아침을 열며-“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아침을 열며-“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0.04.12 16:0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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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대학원장·철학자-“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Μὴ δῶτε τὸ ἅγιον τοῖς κυσίν, μηδὲ βάλητε τοὺς μαργαρίτας ὑμῶν ἔμπροσθεν τῶν χοίρων, μήποτε καταπατήσουσιν αὐτοὺς ἐν τοῖς ποσὶν αὐτῶν καὶ στραφέντες ῥήξωσιν ὑμᾶς.)(마태 7:6)

‘돼지에게 진주…’꽤나 유명한 말이다. 나도 아마 중학교 때부터 이 말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예수의 말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느낌이 더욱 특별해진다. 그에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어떤 ‘성스러움’이 덧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거두절미하고 이 말을 그 설교 중에 끼워 넣고 있다. 문맥도 따로 없고 일부 다른 것들과 달리 보충설명도 없다. 말을 하던 도중에 문득 떠올랐던 모양이다. 그건 평소 그에게 이런 생각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증거다. 개에게 거룩한 것, 돼지에게 진주…, 도대체 예수는 이 세상에서 어떤 장면을 목격하였기에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하필 여기서 예수에게 거론되어 악역을 맡게 된 개와 돼지가 좀 딱하기는 하다. 인간에게는 엄청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좀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개돼지만도 못한 놈…’이라는 일상적 표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렇게 예수에게 이미지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작지 않은 기여 내지 공덕이 된다. 일단 이렇게 그들을 달래놓고 보자.

그러면 이들의 부인할 수 없는 이미지 하나가 드러난다. 이들은 거룩한 것과 진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건 틀림없다. 어떤 훌륭한 개도 예수나 부처에게 따로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무릎에 기어오르거나 꼬리를 흔드는 게 고작일 것이다. 또 아무리 탐욕스런 돼지도 진주를 탐내지는 않는다. 여물과 진주를 각각 그들 앞에 갖다 놓는다면 여물을 마다하고 진주를 택하는 돼지는 없을 것이다. 그 가치를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그 가치를 안다. 저 존 스타인벡의 소설 <진주>가 보여주듯이 인간들은 진주 앞에서 눈이 뒤집어진다. 심지어 그것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 가치가 돈으로 환산되어 병든 아이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아름다운 여인의 손가락이나 목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기도 한다. 그렇게 그것은 가치 내지 가치 있는 것을 상징한다. 거룩한 것과 진주는 가치 있는 것, 개와 돼지는 그 가치를 모르는 존재를 각각 나타내는 것이다.

이렇게 분명히 정리해놓고 보면, 이제 예수가 한 이 말의 의도가 윤곽을 드러낸다.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가치를 이야기하면 그걸 알아듣기는커녕 오히려 그것 때문에 가치를 이야기한 이쪽이 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예수 자신이 이미 그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가 여기저기서 대제사장, 율법사,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을 거론한 것을 보면 그런 이들이 바로 개돼지에 해당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들은 진주로 상징되는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발로 밟고 그것을 준 사람을 향해 위해를 가하려고 했다. 예수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체험했다. 그들은 예수라는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런 가치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여물 뿐이었다. 그게 아마도 권위 내지 위세, 그런 종류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예수는 그들을 일컬어 ‘외식하는 자’라 부르기도 했다. 그런 걸 예수는 개밥이나 돼지죽으로 여긴 것이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다. 그런 개돼지 같은 이들이, 아니 개돼지보다 못한 이들이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소크라테스도 똑같은 경우였다. 그의 말들을 들어보면 그것이 거룩한 것, 혹은 진주 같은 것임을 곧바로 알 수 있다. 정의, 지혜, 용기, 절제, 우정, 사랑, 경건, 덕, 진리 … 그게 그의 관심사였고 주제였다. 그런 가치들을 그는 한 평생 추구했고 대화를 통해 일깨우고자 했다. 잠에서 깨우는 등에 역할을 자처했던 것이다. 그는 그의 그런 진주를 개돼지들에게도 던져줬다. 정치가 지식인 기술자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장면에 등장한다. 멜레토스, 아뉘토스, 뤼콘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대표한다. 그들도 그 진주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부와 지위와 명성이라는 꿀꿀이죽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진주를 짓밟았고, 그 진주를 던져준 소크라테스를 찢어 상하게 했다. 법정에 고발했고 결국 독배를 마시게 했다.

그런 개와 돼지들이 인간 세상에는 득시글거린다. 역사 속에도 그들은 많고 뉴스 속에도 그들은 많다. 그들은 도처에게 멍멍거리고 꿀꿀거린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말해봤자 소용없다. 오늘날에도 예수의 제자들과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적지 않다. 그들은 지금도 거룩한 것과 진주를 갖고 있다. 던져주고 있다. 그러나 개와 돼지들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해코지를 한다. 나도 그런 경우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에게 거룩한 것과 진주를 던져주지 말자. 예수가 던져주지 말라고 했다. 나는 ‘말라’는 예수의 이 말이 그의 선량한 추종자들을 위한 따뜻한 염려라고 이해한다. 나도 그런 진주 같은 말이 개와 돼지의 발에 밟히고 훌륭한 존재들이 개와 돼지들에게 해를 입지 않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희생은 예수와 소크라테스만으로도 이미 너무나 가슴 아프다. 진주는 역시 미인의 손가락과 목에서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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