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밥그릇의 변천사
세상사는 이야기-밥그릇의 변천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6.27 15:0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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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숙자/시인
백숙자/시인-밥그릇의 변천사

부엌에는 방 쪽으로 큰 무쇠솥이 걸려있다. 큰 솥은 식구가 많은 대가족의 밥을 지으면서 불이 구들장을 데워 방을 데우는 구실도 한다. 밥 짓고 방도 데우고 일거양득 선조님들의 해 밝은 지혜요 철학이다. 그리고 그 옆에 걸려있는 좀 작은 솥은 국을 끓이고 더 작은 알루미늄 솥은 볶음 데침 등 손 빠른 음식을 한다. 검은 무쇠솥 안에는 하얀 쌀밥과 거뭇거뭇 보리밥이 섞여 뜨거운 김 아래 한가득하다.

요즘처럼 핵가족 시대 같으면 저 많은 걸 누가 다 먹냐 했을 텐데 그때는 몸으로 움직이는 모든 힘은 밥에서 나왔다. 그러니 많이 먹어야 몸이 부리는 힘도 세어진다. 힘이 세다는 것은 그만큼 일을 많이 할 수 있다는 말과 통한다. 그래서 밥심으로 산다고 했던 것이다.

달덩이같이 보리쌀 위에 얹혀있는 하얀 쌀밥, 고소한 밥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밥의 밭, 그 속을 큰 주걱으로 살살 저어가며 제일 먼저 할머니 밥을 떠서 작고 앙증스러운 놋그릇에 담아 뚜껑을 덮는다. 아버지 밥그릇은 좀 더 크고 높다. 밥을 떠서 뚜껑을 닫아 국과 찬을 올리고 겸상을 차려 드린다.

할머니 밥상에 올라가는 그릇은 밥과 국그릇부터 간장 종지까지 모두 놋그릇이다. 그리고 힘으로 농사일을 하는 아저씨의 밥을 담는다. 밥그릇은 만복자가 새겨진 아주 크고 넓은 사기그릇이다. 어머니는 주걱으로 꾹꾹 눌러가면서 밥을 푸는데 밥그릇 안에 담긴 양보다 그릇 밖에 올라가는 양을 더 많이 고봉으로 담으며 흘러내리지 않게 주걱을 비스듬히 세워 눌러 담는다.

어머니의 마음은 일꾼은 밥을 많이 먹어야 힘을 쓸 수 있고 힘이 좋으면 일의 능률도 훨씬 높다고 여기니 이 논리야말로 지혜로운 어머니만의 철학이기도 하다. “밥을 그릇에 잘 담는 것도 요령이 있어야제”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언니와 동생의 밥그릇은 작은 놋그릇이다. 새언니와 어머니의 밥은 누룽지만 남기고 긁어낸다. 투박한 사기그릇이다. 숟가락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요란한 소리도 노래가 되던 즐겁고 행복한 밥상, 빙 둘러앉아서 먹던 식구들의 넉넉하고 소박한 모습이 추억이 됐다.

밥그릇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1940년 용량 약 650ml, 1950년대 630ml, 1960년대 550ml, 1980년대 400ml, 1990년대 360ml, 2000년대 290ml, 2015년 200ml 정도로 점차 크기가 작아졌다고 한다. 요즘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색깔과 무늬가 예쁜 그릇에 보기 좋게 담아 먹는다. 마시는 찻잔은 또 어떤가! 그 모양과 무늬의 화려함이 예술이다. 나도 가끔 제법 고급스러운 찻잔으로 우아한 여유와 낭만을 곁들여 마시는데 한층 격조 높은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지금도 나는 간식보다는 밥을 좋아한다. 특히 잘근잘근 씹히는 식감의 보리밥을 더 좋아한다. 그러니 조선의 최고 화가 김홍도의 그림 단원 풍속화첩 ‘지본담채’ 에 보면 점심의 풍경은 그야말로 행복한 무릉도원이다. 먹는 재미와 여유, 풍만한 배를 두들기며 비스듬히 나자빠져 앉아있는 모습은 사람은 먹어야 산다는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행위를 증언한다. 밥그릇의 변천사를 기록으로 보면 우리 선조는 기본적으로 식사의 양이 많았다. 조선의 성인 남성은 한 끼에 7홉을 먹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였겠는가! 배곯던 그 시절에는 그릇 모양이나 재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생존을 위해 배를 채울 수 있기를 소망했다.

1940년대와 50년대 6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의 힘은 밥그릇 크기에서 나왔다. 영국의 여행가 이사벨라(1831~1904)는 “조선 사람들은 보통 한 끼에 3~4인분을 먹어치운다”고 했고, 프랑스 선교사 다블뤼(1818~1866) 주교는 “60대 중반의 한 노인은 입맛이 없다고 하면서도 다섯 공기를 먹었다. 그것은 큰 충격이었다” 라고 전한다. 과거에는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감을 늘 안고 살았다. 오늘과 내일을 살아내더라도 한 달 뒤에 양식이 떨어지고 또 춘궁기인 보릿고개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다.

우리 집에도 60년대에 와서야 관리가 힘든 놋그릇은 제사 때에 제수 그릇으로만 남기고 모두 가볍고 편리해진 스테인리스 밥그릇과 사기로 된 국그릇으로 바뀌었다. 직접 만든 농주도 큰 옹기에 담그니 그 맛은 일품이다. 더러는 옹기 뚜껑에 담아 바가지로 휘휘 저어서 새참으로 황금 주전자에 담겨져 들로 나갔다. 차츰 밥솥도 큰 솥은 밀려나고 작은 솥이 나오고, 그다음으로 전기밥솥이 입맛에 맞게 출시되었다.

놋그릇은 윤이 나게 자주 닦아야 하는 불편도 있지만 음식이 식거나 상하지 않는 이점과 가치가 높아서 일본 강점기때에 순사들이 집안을 뒤지고 이 잡듯이 찾아내 무조건 빼앗아 갔다고 들었다. 조상의 얼과 힘 그리고 인내의 무기였던 놋그릇이 그 시절 지배국의 전쟁물자로도 높이 평가됐다니, 애환 서린 우리 것들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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