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15년간 왕을 보좌했던 명재상지난해엔 네가 먼저 자식을 잃더니 올해는 내가 너를 잃으니 부자간의 정이야 네가 먼저 알 것이다. 너는 내가 묻어주었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나를 묻어줄 것이며, 너의 죽음을 내가 슬퍼했지만 내가 죽으면 누가 곡(哭)해줄 것이냐! 늙은이가 통곡하니 청산도 찢어지려하는구나!
범허재(泛虛齋) 상진(尙震, 1493~1564)이 먼저 간 아들에게 지은 제망자문(祭亡子文)이며, 다음은 선생의 유언이다. 내가 죽은 뒤 시장(諡狀)에 업적이 이렇다 저렇다 적을 것 없이 ‘공이 만년에 거문고 타기를 좋아하여 얼큰히 취하면 〈감군은(感君恩)〉곡(曲)을 타면서 스스로 즐겼다’ 하면 될 것이다. 다음은 선생의 묘비명이다. 시골구석에서 일어나 세 번이나 재상의 관부(官府)에 들었도다. 늘그막엔 거문고를 배워 늘 임금의 은덕(감군은, 感君恩)을 곡조로 타다가 천수를 마쳤노라(超自草萊 三入相府 晩而學琴 常彈感君恩一曲 以終天年).
15년 간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으며 조정과 민간의 신망이 두터웠다. 황희(黃喜, 1363~1452)가 세종 때의 명재상이었다면 조선 중기에는 상진이 명재상으로 일컬어진다. 15년을 재상으로 왕을 보좌했지만 누구도 상진을 권력에 눈이 어두운 인물이라고 평가하지 않는 데는 그 스스로 수신(修身)에 철저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명재상이라면 백성들을 아끼고, 청렴결백해야 하며 조정 내에 적이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상진은 당대의 대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거문고를 즐겨 탔다고 한다. 그의 묘비명에서 소탈함을 느끼게 한다.
그가 죽은 뒤 부인 김씨는 조석으로 남긴 옷과 타던 거문고를 진설하여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김씨가 죽은 뒤로 거문고는 행방을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거문고가 분실된 지 30여 년이 되는 1628년 60년 만에 외손 이후기(李厚基)가 남의 집에 있는 이 거문고를 찾아내 악공(樂工) 상(象)에게 수리를 부탁했는데, 이 거문고는 상의 부친이 제작한 것이었으니, 그 깊은 사연에 모두 감동했다.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이 사연을 ‘금명(琴銘)’이라는 글로 남겼는데, 거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감군은(感君恩)〉은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전하므로 현대어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사해의 바다 깊이는 닻줄을 가지고 잴 수 있겠지만 임금님의 은혜는 어느 줄로 잴 수 있겠습니까? 끝없이 복 받으시어 오래오래 사시옵소서. 달 밝은 밤 낚싯대 드리우는 것도 임금님 은혜 시로다. 거문고가 그 사람인가, 그 사람이 거문고인가? 사람으로서 거문고를 전했고, 거문고로써 마음을 전했는데, 사람과 거문고 모두 없으니 다시 지금부터 시작하리라(琴其人耶 人其琴耶. 以人傳琴, 以琴傳心, 人琴不亡, 更始自琴).
선거 열기로 벌써부터 시절이 뜨거워지고 있다. 사람을 잘 뽑아야 한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선생의 철학을 본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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