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이놈 자식들,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칼럼-이놈 자식들,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8.09 17:1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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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이놈 자식들, 나 뒈졌나 안 뒈졌나 보러 왔지?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1850~1927·77세)선생이 두 제자가 문병을 오자 마지막 남긴 말이다. 과연 대인(大人)다운 걸작의 유언라고 생각된다. 본관 한산. 충청남도 서천군 출신. 자 계호(季皓). 아호 월남(月南). 고려 시대 학자 겸 정치가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대한제국 의정부 총무국장·개화파 운동가·교육자·언론인·정치가이다.

31세 때인 1881년 일본을 시찰, 개화사상을 접하였으며, 귀국 이후 개화파 관료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에 연루되어 관직에서 사퇴하였다. 정치적 스승인 박정양의 몰락 이후 고향에서 은거하다가,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외교에 개입한 청나라 사신을 물리치고 직접 외교의 길을 열었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49세 때인 1899년 11월 독립협회·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52세 때인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 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20년대 중반 조선일보 사장과 신간회에서 활동하였다. 개인적으로 재물에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전셋방을 전전하였다. 후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의 정치적 스승 중의 한사람이었다.

할아버지가 별세하여 선산에 안장되었으나, 그의 선산이 참의를 지낸 김씨 집안 선산과 경계 마찰로 아버지가 투옥되자 관청에 찾아가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옥살이를 하겠노라고 군수에게 청하여 아버지를 석방시키고, 자신이 대신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일이 있을 만큼 효심이 지극했다. 인연이 있어 승지 박정양의 개인 비서로 일한 경험은 선생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국내외 정세에 대한 지식을 쌓기 시작한 시기였다. 조정의 신임을 받는 젊은 선비이자 개화파 지식인인 박정양을 만난 사건은 일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84년 우정국 총판(郵政局總辦) 홍영식의 권고로 우정국 주사(主事)에 발령받아 인천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해 10월 11일에는 우정국 사사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직전 그는 정변을 도왔으나, 3일 만에 실패하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농사를 짓다가, 37세 되던 해인 1887년 박정양에 의해 다시 등용되었다. 그해 6월 박정양이 미국 전권대사로 임명되자, 미국공사관 2등 서기관으로 1년여 동안 워싱턴 D.C.에서 근무했다. 귀국 후 낙향하였다가 개화파 지도자들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다시 관직에 등용되어 여러 중요 직책을 맡게 된다. 1896년 7월 서재필·이승만·윤치호·이완용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협회 위원이 되어 민권운동에 투신하였으며, 대중계몽집회인 만민공동회 의장을 맡아 활동했다. 1898년 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1925년 4월 15일 제1회 전국기자대회가 열리자 의장에 피선됐고,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이념을 초월한 각계 인사가 모여 신간회(新幹會)를 결성하자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만년에 노환으로 고생하다가 말초신경에 부종 증세로 고생하였으며, 1927년 29일 경성의 전셋방에서 병사. 사망 당시 쌀 27가마의 빚을 남겼다. 이 빚은 윤치호·이승만·김성수·안창호·송진우 등이 모금운동을 하여 그의 빚을 갚아주었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세 아들이 그보다 먼저 죽고, 넷째 아들만이 임종을 지켰다.

사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거족적인 사회장(社會葬)이 거행되었으며 10만 인파가 몰렸다. 선영인 충남 서천군의 선영에 장사지냈으나, 1957년 대통령 이승만의 지시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되었고, 시인 변영로가 묘비문을 썼다. 고향인 한산면 종지리에 송덕비가 건립되었으며, 1956년 대통령 이승만의 특별 지시로 공보처에서 <이상재 선생 략전>이 발간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서울 종묘공원에 동상이 설치되어 있고, 독립기념관에는 다음 문구를 새긴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서리가 오기 시작하면 반드시 굳은 얼음이 얼고야 마는 것은 필연의 이치인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한 가지 두 가지 일이 외국에 침식되니, 계속 이와 같이 나간다면 몇 날 몇 달이 못 가서 전국의 권한이 모두 외국에 양도되어, 태아(太阿)의 칼자루를 거꾸로 쥐게 되는 후회를 남기게 될지 어찌 알겠습니까’이런 깨끗한 지도자가 그리운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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