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함께하는 세상-젖은 눈을 깜박이며
시와 함께하는 세상-젖은 눈을 깜박이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8.11 17:09
  • 15면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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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하/시인
이창하/시인-젖은 눈을 깜박이며

젖은 눈을 깜박이며

소녀들의 꿈이 적출당한
군도가 부스러기처럼 떠 있는 자바섬

후타다소라 불리던 위안소들이 스마랑 시내에 그물처럼 퍼져 있었어

큰 눈을 감으면
통증이 깊어지는 저녁
붉은 꽃잎들 몸 밖으로 흘러 넘쳤어

어린 소녀들의 하얀 팔둑에 무수히 피어나던 양귀비꽃
감각 없는 허벅지를 쓸고 가는 무거운 손가락들
군화의 거친 숨소리 핏물을 밟으며 돌아가는 새벽
새 한 마리 높게 달린 작은 채광창으로
젖은 눈을 깜박이며 날아가곤 했어

구름은 항구의 울음을 묻어주었지
참혹함으로 바람은 붉게 젖었지

목마른 손톱이 위험하게 빛날 때
어린 목소리는 분홍의 보호색을 부르며
적막한 눈을 다시 감았어

연명지의「스마랑 항구의 비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광복된 지 오래되었지만, 아직도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 오래도록 우리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은 위안부 할머니들이리라. 그러한 사건에 대해서 아직도 일본은 사과는 고사하고 오히려 있었던 사실조차도 부정하고 덮어버리는 그들의 야만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분노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다. 이름조차도 생소했던 인도네시아 섬으로 끌려가서 온갖 유린을 당하면서 그야말로 죽지 못해 겨우 연명을 해 오다가 해방이 되어 어렵게 귀국했지만, 그들을 대하는 사회는 암담했고, 한때 피해를 입고도 스스로 숨기기에 바빴던 슬픔의 역사는 모두 알고 있다.

어린 나이에 모든 꿈이 짓밟혔다는 사실 자바라는 그 많은 섬 중에서 어느 섬에서 영어(囹圄)가 되었는지 탈출은 고사하고 자신의 상황조차 호소할 수 없었던 그곳 ‘후타다소’라는 이름에서 오는 말처럼 무미건조한 육체적 고통, 밤마다 두려움에 떨면서 여성의 상징성이 비참하게 꺾어지던 그곳, 현실적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무수히 자해를 시도한 흔적들, 그러한 상태에서 야만적인 일본군은 거친 숨을 몰아가며 청춘을 짓밟았던 그곳, 작은 창틈으로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며 자유와 고향을 그리워하던 그곳, 그 그리움으로 어린 소녀의 울음소리마저도 철저히 무시해 버리던 그곳, 그곳은 지옥이었으며, 사람이 아닌 야수들이 군집하던 곳이었다.
시인은 <스마랑 항구의 비밀>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비밀이 아닌 부정을 당하는 그곳, 며칠 남지 않은 광복절을 앞두고 파렴치한 역사를 고발하는 시인은 분개하고 있다.

시의 생명은 상징과 은유라 할 수 있겠지만, 가끔은 직설적으로 말해야 할 필요가 있다. 분명히 있었던 사실을 두고, 그 사실을 부정하는 상황에서 굳이 상징성을 동원할 필요하겠는가. 다만, 독자들에게 충분히 감동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시의 생명이 살아나는 것이리라.

연명지 시인의 <스마랑 항구의 비밀>이라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희미해져 가던 역사의 한 장면을 생생하게 느끼고자 한다. 그리고 이번 광복절에는 꼭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진실을 부정하고 숨기고 있는 일본에서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행정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보여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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