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봉오동 대첩 홍범도 장군의 공적
진주성-봉오동 대첩 홍범도 장군의 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8.18 17:2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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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봉오동 대첩 홍범도 장군의 공적

봉오동 대첩, 청산리 대첩의 공로자 홍범도(洪範圖)(1869~1943)장군이 옛 러시아 지역인 카자흐스탄에서 78년 만에 고국으로 귀국했다.

홍범도 장군은 1895년부터 후창에서 의병을 모았다. 1907년에는 함경도 갑산에서 차도선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북청 갑산 일원에서 일진회원들을 주살하고 전선 절단, 우편 차를 습격하였다. 1908년에는 차도선 부대의 5백여명을 지휘하며 일경들을 사살하고 노령으로 피신했다.

조맹선. 윤세복, 차도선 등과 장백 무송 일대에서 포수단을 조직해 활동하고 1911년에는 박영신을 밀파하기도 했고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하고 치고 빠지는 전략을 감행하기도 했다. 1919년 9월에는 이범윤 등과 1천 2백여 명을 이끌고 안도현, 혜산진에서 일본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1920년에는 회령, 종성 일원에서 국내 진공 작전을 하고 1920년 3월 왕청현에서 기관총 7문, 권총 2백 여정, 소총 7백 여정을 노령에서 입수하여 국경지대에서 전투를 전개해 큰 공을 세웠다.

일본은 남양 수비대와 19사단을 파견해 중국 영토 내에서 교전이 전개되었다. 최진동과 함께 독립군 부대를 지휘하여 봉오동에서 적군 수백 여명을 사살하는 대첩(大捷)을 달성했다.

같은 해 국민회가 독립군 부대를 재연합하여 동도독군부를 창설할 때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청산리 독립전쟁에서 제1연대장이 되어 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일본군을 격파하는 큰 공적을 달성했다.

일군의 추격을 피하여 밀산 지역으로 이동하고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김좌진, 조성환 등과 부총재가 되어 서일 장군을 총재로 보필하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1921년 6월 독립군이 해체되고 그 대신 고려중앙정청의 고등군인정모위원이 되었다.

1923년 5월에는 연해주에서 조선독립단 군정서의회를 열고 국내 진공에 대하여 협의하였다. 1924년부터 연해주 인근에서 후진 양성을 위해 활동하다 1937년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옮기고 그곳에 거주하다 1943년 순국하신 분이다.

정부는 훈장 중에 매우 높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1962년에 추서되었으나 금년 8월 광복절에 특별 절차에 의해 1등급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승급, 추서되었고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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