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검소함으로써 청렴을 지켜 가법(家法)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칼럼-검소함으로써 청렴을 지켜 가법(家法)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8.30 17:43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검소함으로써 청렴을 지켜 가법(家法)을 실추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는 재주와 덕이 없는데도 두 번씩이나 있어서는 안 될 자리를 차지했다. 비록 모두 시사(時事)로 몹시 힘들 때를 만나긴 했어도 명을 받아 고작 열 달을 채우지 못함을 면치 못했다. 근래에는 겨우 반 년 만에 문득 실패하여 물러나니, 돌이켜 보면 부끄럽고 두려워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명정(銘旌)이나 제주(題主)와 표각(表刻)에는 영추치사(領樞致仕)’ 즉 영추(領樞)로 치사했다고만 써야지 ‘의정(議政)’이란 두 글자는 절대로 쓰면 안 된다. 내 평소의 뜻에 따르도록 해라. 시호(諡號)의 경우 과거에는 포폄(褒貶)이 다 있었지만 후세에는 포장(褒獎)함 만 있고 폄척(貶斥)함은 없다. 사사로운 뜻이 또 크게 행해져서 비록 아름다운 시호라도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게다가 사람들이 혹 유계(遺戒)는 청하지 못하게 하면서, 후손들이 다른 사람의 글을 얻어 뜻에 맞게 여기게 해서는 더더욱 안 된다. 후세에 보일만한 공업도 없이 남에게 넘치는 기림을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다. 하물며 지위가 이에 이르고서도 터럭만큼도 보답함이 없는 경우는 말해 무엇 하겠느냐. 더욱 스스로 낮추어 부끄러운 마음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다만 짤막한 표석에 스스로 지은 글을 새기고, 또 자신의 글로 광중(壙中)의 남쪽에 묻는 것은 괜찮다. 관재(棺材)는 비록 이미 마련해둔 것이 있더라도, 혹 조정에서 은혜로이 내리시는 것이 있거든 마땅히 이것을 써서 덕스런 뜻을 받들어야 한다. 공연히 어느 것이 낫고 못하고를 따져 쓰거나 버려서는 안 된다.

위 내용은 유척기(俞拓基:1691~1767)가 자식에게 자신의 사후를 당부한 유계(遺戒)의 일부 내용이다. 처세의 지침이 될 만한 말들이다. 선생은 이 글에서 선대로부터 이어져온 검약의 정신을 당부했다. 영조 때의 문신(文臣)으로 자(字)는 전보(展甫). 호(號)는 지수재(知守齋)다. 시호(諡號)는 문익(文翼)이고 본관(本貫)은 기계(杞溪)다. 23세 때인 1714년 문과에 급제했고, 경종 때 왕세제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가 반대파인 소론파 언관(言官) 이거원(李巨源)에게 배척을 받아 함경도 홍원현 해도로 유배되었다가 동래로 옮겨져 위리안치 되었다. 34세 때인 1725년 영조 즉위 후 노론이 집권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대사간으로 다시 기용되어 영의정까지 올랐다.

자신의 관에 덮을 명정에 쓸 글자부터 관에 쓸 목재와 수의, 그리고 제사의 절차와 무덤의 제절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당부하여 적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로 구분하여 엄하게 분부하는 일도 놓치지 않았다.

선생은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음에도 철저히 자신을 낮춰 결코 사치스럽거나 분수에 넘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선생은 처세의 지침이 될 만한 여섯 가지를 남겼다.

첫째, 망령된 사람을 경계하라. 무게 있고 진실된 벗을 사귀어야지, 입만 살아 말로는 못할 일이 없고, 행실이 경박하고 태도가 경망한 사람과는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망령됨과 편벽됨을 잘 분간하라. 무슨 일이든 정도에 넘치면 재앙의 빌미가 된다.

셋째, 말을 따져 살펴하라. 내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말도 하나하나 앞뒤를 따져보고 같고 다름을 점검해야 한다. 여기서 이 말 하고 저기서 저 말 하면 못쓴다. 말에 일관성이 없는 사람과는 함께 어울려 얻을 것이 없다. 말을 점검해 보면 그 사람의 그릇이 보인다.

넷째, 행동을 삼가라. 잘 나가다가도 한 걸음 실족하면 돌이킬 수가 없다. 바탕 공부 없이 고상한 이야기나 하면 듣는 이가 업신여긴다. 제멋대로 방종한 것과 통 큰 것을 착각하지 마라. 공연히 성질을 부리며 남을 제 밑에 두려는 자와는 아예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 큰 소리 치지 마라. 아무데서나 목청을 높여 방자하게 구는 것은 상서롭지 못하다. 떠벌리지 마라. 젠 체 하지 마라. 지나친 것은 부족한 것만도 못한 법이다.

여섯째, 취하기보다 베풀기를 우선하라. 남의 것을 내가 가져오면 원망이 함께 따라온다. 술과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피해가 내게로 온다. 하지만 재물의 이익은 대부분 다른 사람의 손실의 결과일 때가 많다. 그러니 재물의 이익에 연연해서 자신의 복을 깎는 행동을 하지 말라.

선생의 사후 영조는 묘소의 사방 4km(10리)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렸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신도비는 세우지 않고 69세 때 벼슬에서 물러난 다음 해인 1761년(영조 37년)에 스스로 쓴 묘갈명을 남겼다. 선생의 삶은 후세인들에게 큰 귀감이 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