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초등학교 교정’을 거닐며
세상사는 이야기-‘초등학교 교정’을 거닐며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02 17:34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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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초등학교 교정’을 거닐며

영 끝이 없을 것 같은 무더운 여름도 세월에는 어쩔 수 없는지 이젠 물러난 것 같다. 제법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에는 한기까지 느끼게 한다. 이런 한기가 더욱 절실히 피부에 와 닿는 것은 다가오는 세월이 기쁘기보다는 가는 세월이 아쉬운 나이가 됐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원히 지닐 것 같은 젊음이었는데 시간이 바로 뒤에서 밀면서 따라오는 것 같은 강박감조차 느끼니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한탄했던 옛 선지자의 절규가 생각난다. 그래서 그런지 요즈음은 매우 작은 일에도 가슴이 찡하고 눈시울이 뜨거울 때가 잦다.

지난 일요일, 나는 뜬금없이 내가 다녔던 시골 초등학교에 가보고 싶었다. 경남 김해시 한림면 안명초등학교. 아득한 옛날을 떠올리며 어린 시절 학교 갈 때처럼, 가슴 설레며 시오리 길을 터덜터덜 혼자서 걸어서 갔다. 어린 가을. 모시바람이 사각사각하다. 바람 속에 뼈가 없다. 육즙이 모두 휘발돼 새물내가 난다. 고슬고슬 하다. 어린 가을바람은 상크름하고 새콤달콤하다. 초가을 날씨는 선들선들 푸르스름하다.

6,70년대 까지만 해도 흙먼지 날리던 울퉁불퉁 소달구지가 다닐 정도로 조붓했던 길은 2차선 포장도로로 변해 자동차들이 쉴 새 없이 쌩쌩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너무 위험해서 자동차가 지나갈 때마다 나는 한껏 몸을 사리며 가로수 밑으로 바짝 비켜서서 걸음을 멈추곤 했다.

진달래며 산딸기, 찔레 덩쿨이 울타리처럼 에둘러 있던 신작로가 산자락에는 식당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더러 주유소와 25시 편의점도 보였다. 너무도 변해버린 환경 때문에 유년 시절의 무채색 기억이 한사코 희미하게 움츠러들었다.

당시 교정에 긴 칼을 옆에 차고 있던 이순신 장군은 무고하신지, 기름걸레로 반질반질 닦아 놓은 교실과 복도는 아직도 윤기를 잃지 않고 있는지, 어린 시절 그늘이 됐던 교정 한쪽의 나무는 여전히 또래들의 눈높이만큼 자라있는지, 50여 년 세월의 간극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내게는 유년시절 등 하굣길의 추억이 찐득하게 살아 있다. 등교할 때는 행여 지각을 할세라 달음박질 쳐 30분도 안 걸렸지만, 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올 때는 해찰을 하느라 두서너 시간도 더 걸리곤 했다. 도시락을 가져갈 형편이 안 돼 배가 고픈데도 친구들과 노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봄에는 산비탈에 핀 참꽃을 따 먹거나 찔레를 꺾어 먹고, 여름이면 함께 어울려 도랑에서 붕어와 가재 미꾸라지를 잡고, 가을이면 머루랑 다래랑 따먹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썰매를 타고 놀았다. 집에 일찍 돌아와 봤자 소꼴을 뜯거나 잔심부름을 하기 싫어 되도록이면 해가 설핏해서 슬그머니 집 안으로 숨어들어오곤 했다.

학교에 오가는 길에 도붓장수 같은 낯선 사람도 만날 수 있었고 뱀이며 벌집을 건드려 오금이 저리도록 도망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것보다 학교 오가는 길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훨씬 즐거웠던 것 같다.

학교 오가는 길에 자연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다. 그 길은 나를 성장시켜준 인생의 길이 되어주기도 했다. 유년 시절의 그 길이 있었기에 내 정서가 마르지 않았으며 인생이 조금은 풍요로울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그 크던 교사와 운동장은 어디로 가고, 신축한 작은 교사와 좁은 운동장이 나를 맞았다. 나는 한 시간 가까이 학교에 머물며 혼자 교정도 걸어보고 유리창 너머로 교실 안도 들여다보았다. 그 시절에는 일요일에도 운동장에 늦게까지 아이들이 벅신거리며 뛰어 놀았는데 지금은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오는 동안에 초등학생은 한 명도 만날 수 없었다. 시골에 아기 울음소리가 사라진지는 이미 오래되었고 요즘에는 초등학교 학생 보기도 어렵다. 도둑고양이 소리 대신 아기 울음소리를 듣고 아침이면 책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꼬맹이들로 마을이 시끌벅적한 정경이 새삼 그립다.

농촌에 그런 날이 올 수 있을까? 농촌에서 젊은이들이 줄고 해마다 폐교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그런 정경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누구든 한번쯤 유년의 교정을 거닐어보기 바란다. 유년의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흑백여행처럼 부담이 없다. 그곳을 다시 가보는 것은 자신의 삶을 뒤돌아보기 위함이고, 유년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순수했던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앞을 바라보기보다 뒤돌아보고 사는 것도 그리움이 등 뒤에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뒤돌아보며 사는 여유를 즐길 때 인생은 보다 풍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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