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그리움과 눈물의 성묘
세상사는 이야기-그리움과 눈물의 성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12 17:2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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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동/수필가
김창동/수필가그리움과 눈물의 성묘

초록이 시나브로 여위어간다. 뜨거웠던 여름은 서서히 그 강렬한 빛을 지우기 시작했다. 조석(朝夕)으로 바람의 기색이 달라졌다. 소슬한 바람이 불어온다. 달력을 보니 벌써 추석이 다가온다. 다가오는 것이 또 있다. 성묘다. 추석맞이 성묘가 한창이다. 산소를 찾아가 덥수룩이 자란 잔디와 풀을 베어 내리고 깊은 절을 올리리라. 생전에 조금이라도 더 잘해 드릴 걸 스미는 후회에 몸을 적실 게다. 요즈음의 성묘 모습은 바뀌고 있지만, 조상에게 올리는 그리움이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난 주말 이 땅의 산언덕이며 골짜기는 추석 성묘를 위해 벌초를 하는 예초기 소리로 요란했다. 예초기로 하는 벌초란, 낫으로 하는 벌초와는 달라서 순식간에 해치우는 습성이 있다. 지난 날 모름지기 벌초는 낫으로만 했다. 한 주먹 한 주먹 몸을 낮춰 무릎을 꿇고 풀을 베며 조상의 음덕(蔭德)을 기리고 자손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했다. 요즘엔 집안에서 벌초를 하러 갈 사람이 없어 그것을 대행해 주는 전문 업체들에 많이 맡기고, 봉분보다는 납골묘를 만드는 것을 선호한다고 하니, 아마 머지않은 미래에는 이런 벌초 문화 자체가 없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벌초를 마친 동그란 봉분을 예쁘게 드러낸 무덤들이 하늘을 보고 웃고 있다. 터벅머리 소년이 정갈하게 가르마를 타고 이발소에서 막 나온 듯 한 모습이다. 벌초가 끝나면 모두들 십 년 묵은 체증을 내린 듯이 시원하고 뿌듯한 마음이 되지만, 벌초를 하러 가는 날이면 항상 걱정이 많았다. 혹 산중에 들어가서 왕벌에게 쏘이는 건 아닌지, 독이 오른 뱀에게 물리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곤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후손들도 하나 둘 세상을 떠나 그 무덤들을 어떻게 정리를 할 것인지, 무덤들은 이 산, 저 산 가파른 산꼭대기와 골짜기에 흩어져 있어 하루 만에 벌초를 마치기가 힘들고, 어떨 땐 잡초가 너무 우거져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

요즘 아예 찾지 않는 방치된 무연고 묘지들이 많다는데, 그래도 한 해에 한 두 번씩이라도 이렇게들 모여 벌초를 하고 있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무덤 주위에 개미굴로 팬 곳들을 찾아 흙으로 메워주다가 돌아가신 할머니의 쪽 찐 머리, 빙그레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랐다. 사람의 모습은 덧없이 가버리지만, 그가 남겨준 인연의 흔적들은 늘 무의식에 남아 있는 것 같다. 머지않은 날 내 무덤이 이 자리에 놓인다면 나는 누구에게 어떤 인연의 흔적을 남기게 될 것인지, 문득 죽음이라는 존재가 참 가까이 다가왔다.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인데 우리는 일상생활의 번잡함에 묻혀 그것을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올 죽음이라는 필연성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에 잊는다기보다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피하고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생전에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친 욕심을 부리는 사람을 보면 “사람이 얼매나 살끼라꼬”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어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는 무심코 흘려 들었던 그 말씀이 요즘 우리사회의 위정자들과 공직자들의 끊임없는 위선과 지나친 탐욕과 집착으로 끝없이 추락하면서도 ‘내로남불’로 뻔뻔 당당한 모습들을 보노라면 “남에게 밑져도 잘해주라, 그러면 나중에 베푼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얻음이 생길끼다” 라는 어머니의 그 말씀이 왜 자주 생각나는 것인지? 명예나 예의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염치만이라도 지켜달라는 것, 그것이 국민이 바라는 최소한의 주문이다. 지금 생각하니 어머니는 참 지혜로운 분이셨던 것 같다. 인간의 운명적인 한계 상황인 죽음까지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시는 지혜로움을 갖추셨고, 그 지혜로움을 바탕으로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신 분이었다. 자신에게는 마치 죽음이 없는 것처럼 천방지축으로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보면, 어머니는 또 “사람이 얼매나 살끼라꼬”라고 야단을 치실 것 같다.

벌초를 위해 산을 오르고 내려오는 동안 가을이 오는 기미를 느껴 보는 것도 좋다. 살붙이들과 함께 산길에 핀 계란 프라이꽃 구절초며 연보랏빛 도라지꽃 한 송이를 들여다보는 기쁨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젊어서는 잘 모르지만 들판에 핀 벼 이삭을 들여다보는 기쁨은 그 중 으뜸이다. 아무리 꽃이 예뻐도 가을 들녘이 가져다주는 느낌을 따라가지는 못한다. 영글어가는 벼 이삭과 탐스럽게 익어가는 갖가지 오곡백과의 열매를 보며 감사를 느끼는 나이쯤이 돼야 인생을 조금 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왜 가을 하늘의 흰 구름은 우리에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게 할까. 구름도 조상의 산소에 앉아 바라보는 구름은 그 느낌이 다르다. 흐트러지지 말고 잘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가을에는 너도나도 성숙해진다. 혼자 가만히 있어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훌륭해질 수 있다. 혼자 있으면 듣게 된다. 혼자 있으면 자꾸 시선을 내 안으로 향하게 되어 있다. 너무나 번잡하고 빠르게 변해 가는 세상 시스템 때문에 언제부턴가 우리의 듣는 귀는 온갖 난무하는 저급한 소음과 추접한 잡음만을 들을 뿐, 저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영롱한 이슬 같은 영혼을 울리는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가을이 왔다. 벌초를 하는 날이면 삶이 죽음과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 인간의 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그 다음 세대들에게 깊은 인연의 실타래로 엮여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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