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역사의 발전
아침을 열며-역사의 발전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13 17:3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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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역사의 발전

‘역사는 발전하는가?’ 이 주제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제기돼 왔고 논의될 만큼 논의되었다. 그만큼 관심을 끄는 주제라는 뜻이겠다. 이게 왜 관심을 끌겠는가. ‘역사의 발전’이라는 걸 내세우고 싶거나 혹은 그게 미심쩍기 때문일 것이다.

역사가 발전한다는 것은 관념론적 입장이든 유물론적 입장이든, 이른바 ‘변증법’이라는 것을 통해 널리 유포되었다. 인간세상의 현실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면서 꾸준히 발전해 이상적인 상태를 향해간다는 것이다.

헤겔은 ‘자유의 실현’을 마르크스는 ‘공산사회의 실현’을 그 최종 단계로 제시했다. 이런 생각은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거의 신앙처럼 굳건해 보인다. 중세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도 일종의 발전론이다. 원죄에서 시작하는 그 역사는 선악의 각축 과정을 거쳐 신국의 영원한 복락으로 마무리되는 방향을 갖고 있다.

반면 퇴행적인 역사관도 있다. 중국의 유교가 대표적이다. 공자를 비롯한 그들에게는 아름답고 찬란했던 이상적 ‘과거’가 절대적 모범으로 설정되어 있다. 하-은-주 3대다. 요-순-우-탕-문-무-주공이라는 이상적 군주에 의한 군자정치가 실현된 상태였다. 그런데 현실은 춘추전국. 그와 대비되는 혼란과 무질서 상태다. 그래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과거와 같은 덕치의 상태를 지향하자는 철학이다.

유교뿐만 아니다. 역사를 황금시대, 은의 시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의 시대로 나눠 설명한 그리스의 헤시오도스도 유사한 입장이었다. 그의 현실인식은 공자 못지않게 부정적이었다. “올바른 사람, 착한 사람, 맹세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런 혜택도 누리지 못하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과 오만한 사람만 명예를 얻는다. 정의는 폭력에서 나오고 진실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21세기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좀 특수하지만 역사의 과정에서 덧칠된 존재망각의 상태를 현상학적으로 해체하고 ‘원초’의 상태로 끊임없이 ‘되돌아가기’를 강조한 하이데거의 철학도 비슷한 부류다.

그리고 제러미 리프킨 등의 과학적 입장도 이와 유사하다. 그 바탕에는 이른바 ‘엔트로피의 법칙’이 자리한다.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창조될 수도 없다. 단지 그 형태만 바뀔 뿐이다. 그리고 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 유용한 상태에서 무용한 상태로, 질서 있는 상태에서 무질서한 상태로만 변한다. 이 방향을 되돌리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지구에서든 우주에서든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더 큰 무질서를 만들어내야만 한다. 따라서 엔트로피 법칙은 역사가 진보의 과정이라는 가설뿐만 아니라 과학과 기술이 질서 있는 세계를 창조할 것이라는 가설을 파괴한다’

한편 끊임없는 반복으로 보는 순환적 역사관도 있다. 문제의 발생에서 문제의 해결로, 또 다른 문제의 발생에서 또 해결로, 그런 문제발생->문제해결의 반복적 과정이 역사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역사관의 배경에는 저 ‘시시포스의 신화’가 깔려 있다. 그리고 저 니체의 ‘동일자의 영겁회귀’ 사상도 깔려 있다. 무익한 노고의 영원한 반복이다. 현실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진실에 가장 가깝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발생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때그때 분투하고 목숨을 바친 무수한 영웅들 그리고 무명용사들이(그 역사의 희생자들이) 이 진실성을 증언해줄 수 있을 것이다.

주야의 반복 계절의 반복 생멸의 반복 같은 우주의 기본질서도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반자 도지동’(反者 道之動: 되돌아옴은 도의 움직임이다)이라는 노자의 말도 이것을 가리킨다.

과연 어느 게 정답일까. 정답은 없다. 다 제각각 의미 있는 견해들이다. 현실 그 자체가 다중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좋았던 과거의 황금시대라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우리 인간이 흘러간 과거를 아름답게 필터링하는 본능적 경향을 갖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현실에 아무리 문제가 많더라도 소위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지금이 과거보다 어쨌든 비할 수 없이 발전한 면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해도 끝도 없이 발생하는 ‘문제’들을 보면 역사적 기시감은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시공을 초월해 사라지지 않는다. 학살자 네로가 죽은 지 2천년 가까이 역사는 흘렀건만 또 다시 학살자 히틀러가 등장했다. 임진-정유왜란이 끝나고 조선통신사가 오가고 했건만 경술왜란은 또 다시 발생했다. 제3의 왜란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그 어떤 역사가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런 걸 보면 순환론도 역시 사실이다.

발전도 퇴행도 순환도 다 답이다. 그러니 ‘이게 정답’이라는 고집을 부리지는 말자. ‘나의 생각’을 남에게, 모두에게, 강요하지는 말자. 그런 고집과 강요를 나는 ‘인문학적 독재’라 부르며 깊이 우려한다. 학설도 결국은 선택이다. 그런 선택을 통해 인간은 자기의 정체(인간의 종류)를 드러내며 그 선택에 대해서는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 선택과 책임은 사르트르가 알려준 대로 우리 인간의 엄중한 실존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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