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성균관 원임부관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성균관 원임부관장-성균관(成均館)국립 성균관은 삼국시대와 고려 조선을 거쳐 일제강점기 이전까지 우리나리의 최고학부였다. 고구려 때는 태학(太學)이라 하였고, 백제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신라는 국학(國學), 고려는 국자감(國子監), 조선은 성균관(成均館)이라 하여 그 명칭은 달리 사용했으나 국가에서 운영하는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향교(공립)와 서원(사립)에서 공부하여 지방에서 치르는 초시(향시)라는 지방과거 급제자에 한하여 200여명을 뽑는 성균관 입학에 응시할 수 있었으니 무척 어려운 일이었으며, 성균관 생원 진사가 된다는 것은 실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었다. 성균관에서 공부하여 대과(大科)에 합격하면 바로 중견관리로 임명되었으니 이는 사대부 자제들의 등용문이었고 최고의 목표라고 할 수 있었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1398년에 성균관에 문묘(文廟)를 설치하고 교육과 병행하여 공자를 비롯한 선성(先聖) 선현(先賢)을 모시고 석전(釋奠)을 봉행하였는데 석전은 국가 무형문화재 제50호로써 나라에서 시행하는 큰 제사였다. 성균관 석전의 헌관은 때로는 군주나 정승 판서가 맡는 경우도 많았고 이는 지방 향교에도 점차적으로 문묘(大成殿)를 설치하여 교육과 병행해 제사를 모시게 하였으니 관학인 성균관과 향교의 중요기능이라 하겠다.
지금도 성균관 석전의 초헌관은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성균관대 총장이 맡는 경우가 많고 지방 항교의 석전에는 시장 군수나 의회의장 교육장 등이 맡고 있으며 대부분 지방자치단체에서 예산을 지원해 주고 있으니 관학으로서의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우리고을 진주는 일찍이 고려 성종 6년(987)에 나라에서 향학당(向學堂)을 설치하여 교육을 하였으니 전국에서도 선구적인 일이었고 향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겠다. 문묘의 설치도 성균관 대성전을 창건하던 1398년에 동시에 건립하였으니 천리밖에 있는 진주목이 어떤 위치에 있었던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한때 조정인재의 반이 영남에 있고, 그 중 반이 진주라 했으며 진주를 ‘인재의 부고’라 했으니 그 화려했던 진주의 명성은 지금도 이어져 진주를 교육도시라 일컬어 아무런 손색이 없는 것이다.
지난 5월 16일 성균관 추기 석전이 있었는데, 뜻밖에도 필자에게 망권이 왔다. 정말 자랑스럽게도 필자가 종헌관을 맡아 헌작하였다. 전국에는 234개의 향교가 있고 헌관은 단 3명을 선정하는데,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역을 맡은 것은 아마도 선현들이 닦아놓은 진주의 명성에 크게 힘입었음을 느끼며 무한한 영광, 자부심과 긍지를 느낀다.
저작권자 © 경남도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성균관대,개교 6백주년 맞아 개최한 학술회의. 볼로냐대(이탈리아), 파리 1대(프랑스), 옥스포드대(영국), 하이델베르크대(교황윤허,독일),야기엘로니안대(폴란드) 총장등 참석.
http://blog.daum.net/macmaca/1467
http://blog.daum.net/macmaca/733
@한국 유교 최고 제사장은 고종황제 후손인 황사손(이 원)임. 불교 Monkey 일본 항복후, 현재는 5,000만 유교도의 여러 단체가 있는데 최고 교육기구는 성균관대이며,문중별 종친회가 있고, 성균관도 석전대제로 유교의 부분집합중 하나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