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항일투사 정성호 공적서
진주성-항일투사 정성호 공적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09.29 17:3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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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항일투사 정성호 공적서

항일투사 정성호(鄭成鎬)(이명:聖五)선생은 진주시 비봉동(계동과 봉곡동 일부) 201번지에서 정택수(鄭宅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립 광림학교를 중퇴하고 진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제 5회 졸업생이 되었다.

대구형무소 ‘신분카드’와 ‘집행지휘서’에 의하면 1919년 3월 18일 진주 3.1운동 시위 첫 날은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 날인 3월 19일 오전 11시에 이영규, 김영조, 천명옥 등과 함께 큰 북, 작은 북, 나팔 등을 치고 불면서 진주 시내 중안동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시민, 학생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토록 했다고 기록되었다.

흥분한 시민들이 도청으로 가자고 외치자 대안동에서 진주성 내 도청 정문인 영남포정사 앞에 도달해 2만 여명이 독립 만세를 고창하자 도청 직원들과 일경들은 놀라 도주했다가 다시 나타나 군중을 행해 잉크 물을 던지기 시작했다. 백의를 입은 조선인들의 옷에 잉크가 묻은 자들을 뒤에 시위 참가자로 보고 잡기 위한 작전이었다.

‘고등경찰관계적록’에 보면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일만 여명 군중이 시위했고 주동자들을 체포했다’라고 기록되었다. 대구복심법원 서기가 쓴 범죄사실에 의하면 ‘3월 19일 오전 11시경 진주 평안동과 대안동 사이 노상에서 악기를 울리며 기세 당당히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쳐 치안을 방해했다’라고 기재했다.

정성호 선생은 1919년 4월 22일 진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형이 언도되었고 6월 2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이 확정되었다. 1919년 10월 12일 대구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출옥하자 바로 진주청년회에 들어가 위원이 되었고 1921년 5월 진주청년회 주최로 대운동회를 개최할 때 준비계 담당과 조사부장이 되어 활동했다.

1923년 4월 15일 진주청년회관에서 형평사 발기회 발기인이 되고 1923년 5월 6일 보천교 소년회 총무 겸 위열부장이 되었다. 정성호 선생은 경남도청을 부산으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결사대를 조직해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1950~1960년대 진주시 인사동 160번지에 거주하며 김해 김씨와 혼인해 1남 3녀를 두었다. 사위 박경원은 중등학교 교장을 역임하였고 서울로 이주해 살다 별세했다. 내년 3월 1일 정부 포상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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