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도록 하라
칼럼-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도록 하라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04 17:3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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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칠암캠퍼스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도록 하라

위 제목은 임진왜란 때 큰 공을 세웠으나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생을 마감한 정문부(鄭文孚:1565~1624·59세)장군의 유언 중에 나오는 말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고 자(字)는 자허(子虛)이며 호(號)는 농포(農圃), 시호(諡號)는 충의공(忠毅公)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23세 때인 1588년(선조 21년) 생원(生員)이 되고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라는 무관으로 첫 관직을 맡았다. 이후 홍문관 수찬·사간원 정언을 거쳤고 1591년 북병영에 딸린 정육품 무관직인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해온 왜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팔도분할계획에 의거하여 가토가 함경도로 진격하였다. 이렇듯 북침해 오는 왜군과 나라에 반역한 반란군, 북쪽에서 침입한 여진족의 문제까지 합쳐져 어려운 상황에서 정문부는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경선전투를 시작으로 길주·장평·쌍포·단천·백탑교 등에서 승리하며 왜병 천여 명의 목을 베어 북관대첩(北關大捷)을 이루었다. 또 여진족까지 토벌하여 국경 6진을 공고히 하였다. 함경도 회령(會寧)에서는 국경인(鞠景仁:?~1592) 등이 반란을 일으켜 적군에 투항하자 반란군이 점령한 경성(鏡城)으로 진격하여 반란을 평정하였다. 또한 길주에 주둔한 왜적과 혈전을 벌여 600여 명의 목을 베고 수많은 군장물을 획득하였다. 이를 길주 장덕산대첩(長德山大捷)이라 한다.

1593년 영흥(永興)부사, 1597년 길주(吉州)목사가 되고, 1599년 호조참의, 160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북관대첩의 승리로 함경도 지방 의병의 지휘권은 정문부에게로 귀속되었는데 이를 시기한 감사 윤탁연의 그릇된 보고로 인해 정문부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전란 극복의 공도 인정받지 못하였다. 1610년(광해군2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615년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다시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북인의 난정(亂政)을 통탄하여 나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다시 관직에 나가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창원부사로 재직할 때 초회왕(楚懷王)에 대하여 지은 시(詩)가 인조를 빗댄 것이라는 오해로 이괄의 난에 연루되어 1624년(인조 2년)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세상을 떴다.

억울하게 화(禍)를 입은 지 41년 만에 영의정만 여섯 차례나 지낸 정태화(鄭太和:1602~1673)의 상소에 의하여 누명이 밝혀졌으며 함경도 지방민의 송원(訟寃)에 따라 1665년(현종 6년) 신원(伸冤)이 회복되었고 1713년(숙종 40년)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고 1788년(정조 12년) 부조전(不祧典:나라에 공이 있는 사람의 위패를 영원히 모시게 하는 것)을 윤허(允許)받았다. 임진왜란 일등공신 좌찬성 대제학으로 추증되었고 그의 공덕을 기려 함경도 경성의 창렬사(彰烈祠), 부령(富寧)의 청암사(靑巖祠)에 배향되었다.

장군의 대표적인 공적은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지방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면서 왜적과 싸워 크게 이긴 공적을 기려, 조선 숙종 때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 고을에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가 세워졌었는데 1905년 러일전쟁 때 이 지역에 출병한 일본군 제2사단 이케다 소장이 이 비문을 보고, 일본군이 패전한 사실이 기록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강탈해가서 동경 야스쿠니 신사 숲 속에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8년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이 발견하고 반환 운동을 하여 2005년 10월 한국으로 가져오게 되었으며, 2006년 3월 우리 정부는 북관대첩비를 원래 위치에 복원시키기 위해 북한에 인도하였는데 길주에 있으며 북한 국보 제193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에는 국립고궁박물관·독립기념관·정문부 장군묘역의 세 곳에 복제비를 세웠으며, 진주에서는 정문부의 후손들이 이를 복제하여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위치한 충의사(忠毅祠)에 세우게 되었다.

장군이 후손들에게 진주에 살라고 유언을 남긴 것은 54세 때 창원부사로 있으면서 진주를 둘러보고 남강변에 길게 이어지는 대숲·백사장의 고요함, 진주성의 수려한 풍모, 진주 사람들의 순박하고 정겨움을 좋아해서 남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장군의 묘는 경기도 의정부시 산단로 132번길 59-17에 있으며 묘와 충덕사(忠德祠)는 경기도 기념물 제37호로 지정(1977년 10월 13일)관리되고 있다. 유언은 ‘다시는 벼슬을 하지 말고 진주에 터전을 잡고 살도록 하라’ 진주 사람은 자부심을 가져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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