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1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05 17:3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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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1

‘엽편(葉篇) 인생론’을 시리즈로 써볼까 한다. 2020년대 현재의 우리 현실과 맞대어보면 그 자체로 읽히는 시사적 의미가 없지 않으리라 기대한다.

1960년대 초 내가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이었을 때다. 우리집에 자주 드나들던 일가친척 중에 U라고 하는 형님이 있었다. 말이 형님이지 그 맏아들이 나보다 열 살 가까이 많았고 둘째도 나보다 나이가 위였으니 사실상 아재뻘이었다. 아버지와도 당연히 친구처럼 지냈다. (나는 늦둥이라 쓸데없이 항렬이 높았고 초등학교 때 이미 손주뻘 친척들이 여럿 있었다.) 가끔씩 놀러 오신 그 형님과 아버지의 대화를 곁귀로 들으며 나는 어렴풋이 ‘어른’의 세계를 느끼곤 했다.

모두가 어려웠던 그 시절, 그분은 구멍 난 고무신을 때우는 것으로 생업을 삼았다. 그게 ‘신기료장수’라고 불린다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나중이었다. 집 앞 대로변에 오일장이 서는 날은 그 형님이 우리 집 근처에서 전을 펼치는 일도 있어서 나도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형님이 능숙한 손놀림으로 고무신 때우는 것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본 적도 있다. 아버지가 그분과 항렬 상관없이 친구처럼 지냈듯이 나도 그 아들과 비슷한 또래였기에 역시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냈고 그 집에 놀러가 자고 오는 일도 있었다.

산아래 동네였던 그 집엔 읍내였던 우리집과는 달리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호롱불을 켰다. 나는 그게 그냥 신기하고 재미있었지만 그때는 그게 시대의 양상이었다는 걸 아직 알지 못했다. 밤이 되자 뒷산에서는 ‘우우~’하는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웠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분은 매일 달라지는 오일장을 따라 인근 일대를 돌며 전을 펼쳤고 열심히 고무신을 때웠다. 그렇게 돈을 벌어 자식들을 키웠다. 그 신 때우는 기계는 쇳덩어리로 엄청난 무게였는데 그걸 매일 짊어지고 장을 돌아 다녔으니 그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월이 지나 그 무게를 내가 마음으로 느꼈을 때 나는 뭔가 모를 숙연함과 위엄 같은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 윗세대가 대부분 그랬듯 먹고 살기에 급급해 교육을 받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 형님도 당연히 학교를 다니지 못했고 그게 한이 되었던지 아들 셋 딸 하나를 전원 교육대학에 보냈다. 그 가슴속에 어떤 원대한 구상이 있었는지는 누구도 들여다보지 못했지만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 선생님이 되었다. 가난한 신기료장수의 집이 일약 ‘교육자집안’으로 거듭난 것이다.

끝내 직접 들을 기회는 없었지만, 그 형님은 아마 그게 인생의 크나큰 보람이었을 것이다. 그중 둘은 교장선생님이 되었고 명예롭게 정년퇴직을 했다. 아버지도 그 형님도, 그리고 어머니도 그 형수님도 세상을 뜨시고 각자 세상살이에 바빠 함께 놀았던 그 조카님들과도 왕래가 끊어졌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그들도 아마 당연히 정년퇴직을 했을 것이다. 그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였던 그 형님이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지 가끔씩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돌아보면 그것도 다 이 나라의 역사의 한 토막이었다. 그 역사의 한 토막을 그들은 자신의 인생으로 살아낸 것이다. 그 쇳덩이 같은 무게를 등에 짊어지고서.

이제는 아무리 가난해도 다들 가죽구두를 신는 세상이 되었다. 혹은 기능성 스포츠화를 따로 챙겨 신기도 한다. 그 누구도 고무신을 때워 신지는 않는다. 불과 몇 십 년 사이 세상은 엄청나게 달라졌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매일 쇳덩어리를 등에 짊어지고 장을 돌아다니며 신발을 때운 그분이 또한 훌륭하신 교장선생님들을 키워낸 위대한 ‘아버지’이기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불과 얼마 전 우리네 삶의 현실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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