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묘청과 김부식의 차이
아침을 열며-묘청과 김부식의 차이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11 17:10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진환/국학강사
김진환/국학강사-묘청과 김부식의 차이

묘청은 서경(지금의 평양) 출신의 승려였다고 전해진다. 그는 역사상 유일하게 기득권의 국가권력과 싸우면서 반란을 일으킨 승려였다. 하지만 그는 불가의 승려일 뿐만 아니라 신선도를 수련한 도인이자 동시에 풍수지리의 대가인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 서경에 지은 임원국의 팔선당에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 산신을 문수사리 보살이라 이름하여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를 육통존자라 이름 붙여 그 다음으로 모셨다고 한다.

묘청은 불교라는 종교적 한계를 넘어서 도선의 정통을 이어받은 신선도의 맥을 이은 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국맥을 이는 것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례로 불교를 수입하면서 2000년 이상을 이어온 국혼이 사그라지기 시작한 때가 바로 이때쯤이다. 새 것에 대한 호기심과 극락에 대한 동경, 경전의 알기 쉬운 풀이는 당시 서민들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이를 치세에 이용한 군주들은 이분법적인 사고에 젖어 들고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여 그들의 권력유지에 급급하였고, 삼국은 본격적으로 단군 이래 형제의 나라가 아닌 경쟁상대로 관점을 바꾸었고 본격적으로 한강 주변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홍익인간이라는 이념을 버린 그 당시 종교라는 게 이렇게 형제를 갈라놓고 피를 흘리며 서로 싸우게 만든 것이다.

지금도 아랍권에서 세계인을 놀라게 하는 국지전의 발생도 그 원인은 다 자기 종교의 우월성을 내세운 편협된 사고방식 때문에 일어나며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쌍방의 골은 깊어지고 있다. 누구를 위한 종교이며 무엇을 위한 종교인가. 국조 단군의 홍익인간 사유체계에서 시작한 우리의 전통사상인 풍류도와 신선도는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 후에 신라가 당나라의 문화에 깊이 젖어듦에 따라 더욱 더 위축되어 갔으며 이러한 점을 안타깝게 여긴 묘청 일파와 사대주의 사상에 깊이 물든 김부식 일파와의 사상 전쟁이 바로 묘청 반란의 배경이다.

당나라에 굽신거리는 속인이 되어서는 한시도 살 수 없다는 생각과 큰 나라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마음이 정면충돌한 것이다. 한 쪽은 의병적 성격을 가졌고 한 쪽은 관군이라 장비와 군비면에 밀린 묘청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이 충분한 준비 없이 마음을 너무 앞세우는 바람에 김부식에게 역습을 당한 것이다.

반란 초기에는 새로운 나라 이름과 연호를 사용하면서도 새로운 임금을 세우지 않고 자신들의 거사를 스스로 개경 정부에 통보하였으며 이는 자신들의 거사가 중심을 잃은 국정을 바로잡고자 한 것이며 왕권을 찬탈하거나 권력을 노린 반란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묘청의 입장에서 고려 정부가 후주의 쌍기 귀화 이후에 도입한 과거시험에 당나라의 유학을 강조하고 그로 인해서 전통사상인 신선도와 국교인 불교가 갈수록 약해지는 것을 우려해서 일으킨 개혁적 의지를 담은 혁명이었고 유학자들에 의해 갈수록 사대사상이 두터워져 가는 고려의 앞날이 염려되어 차마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이를 두고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 역사 1천 년 내의 대사건”이라고 평가하면서 묘청의 실패를 참으로 안타까워하셨다.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과 사대사상의 한 판에서 힘과 유학을 앞세운 김부식의 승리라고 보았다. 그 결과 조정에서는 당나라의 유학파가 득세하게 되었고 국맥을 이었던 정통파들은 현실정치에서 배제되어 재야로 숨어들게 되고 산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또한,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신라 중심사관과 사대주의 사관으로 일관되게 기록하고 민족자주 사관으로 줏대 있게 쓴 역사서들은 모두 수거하여 없애버림으로써 우리는 주인정신을 잃고 방황하게 되고 결국 고려 중기 이후에는 국가 권력이 최 씨 무인정권에 70여 년간 넘어가게 되고 임금은 허수아비처럼 되며 원나라에 충성하며 속국으로 살겠다는 맹세로 임금의 이름이 충렬, 충숙, 충혜등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마지막에는 명나라 말기 청나라가 일어나기 전 맥없이 비틀거리던 고려는 이성계를 필두로 나선 신흥 강성유학자들에게 나라를 넘겨준 것이다. 그 나라 조선 또한 500년 동안 부국강병은 뒤로 하고 배성과 서민들을 쥐어짜고 자기들의 배만 불러대더니 마침내 어이없이 왜인들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고 나라를 내어 주는 참변을 당한 것이다.

국혼과 국맥을 잃은 민족이 어떻게 되는지를 단번에 알아볼 수가 있으니 어찌 통탄하지 않으리오. 지난 2000년 우리가 배운 역사적 교훈은 다음 세 가지다. 종교는 어떤 것이든 나라를 위한 종교이어야 한다는 것, 기득권의 이기심을 채우는 권력은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 무슨 일이 있어도 홍익인간이라는 국혼은 가슴에 안고 가야 한다는 것. 이 세 가지를 명심하면서 현재의 우리를 성찰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사적 국운 상승기에 있다. 국운 상승기라고 해서 우리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공존, 공영, 공생과 상생의 지구촌 시대의 진정한 리더국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또 합심하여 달려야 한다. 천지신명이 도울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