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고독한 정의
진주성-고독한 정의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12 17:30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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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ㆍ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고독한 정의

불의에 시달리는 정의를 위해서는 가만있으면 안 된다. 정의에 동참하고 사회적 불의에 공분하며 의로운 약자에 공감하는 사회로 가꿔야 한다. 부정 앞에 침묵하는 것은 부정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했다. 백 번 수긍하면서도 이행에 주저한다. 따르는 후한을 염려해서다. 정의는 자기보호가 필요로 하지 않아 누구에게나 공정하지만, 불의는 자기보호가 절대적이므로 특정한 보복으로 상대에게 선제공격으로 기습한다. 따라서 그 앙갚음이 두려워 부정 앞에 침묵한다.

인간사회는 모두가 관계로 맺어졌다. 사실을 밝혀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정의는 부정에 잠식되어 사회 전반의 미래를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시시비비가 화두로 떠오르면 침묵해서는 안 된다. 불의나 부정은 정의보다 적극적이다. 부정은 양심으로부터 끝없는 저항을 받고 있어 양심을 짓뭉개지 않으면 자신의 몰락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양심을 제압하려고 수단까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한다. 먼저 이치나 사리부터 부정하고 합리화를 모색하여 합법화로 끌고 간다.

그렇다고 아귀가 딱 맞는 것이 아니다. 양심은 근본이고 부정은 조작이기 때문에 의도대로 맞춰지지 않는다. 이럴 때 동원되는 것이 전례를 들어대거나 남의 경우를 끌어댄다. 보편화를 꾀하자는 것이다. 통상적으로 또는 묵시적으로 암암리에 과거에도 그러했다는 전례를 끌어댄다. 그러나 양심은 진리와 순리에 순응하지 변절하지 않는다. 최후의 수단뿐이다. 자기 고통에서 벗어나 살고 보자는 것이다.

갈등의 골에서 빠져 나와야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살기 위해서는 양심은 묵살하고 부정을 감춘다. 여기까지가 자신과 싸움이다. 엄연한 사실은 양심까지 짓밟은 것이다. 난도질이다. 유린이다. 하지만 양심 앞에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패배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뇌가 따른다. 고통이다. 죄업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망각뿐이다.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그러나 쉽지 않다. 번민이 고통으로 이어진다. 더는 벗어날 수단이 없다. 위선으로 왜곡한다. 그러나 양심의 정의는 불의에 복종하지 않고 순리는 역리를 용납하지 않으므로 번민에서 벗어나지도 못한다. 묻어버리려 한다. 죄악이다. 양심의 선고는 끝났다. 용서받지 못할 형벌로 종결된다.

그러나 세상 밖으로 드러나면 실정법과는 무관하게 불명예라는 종신형의 수의를 입고 살아야 한다. 언제까지라도 끌고 다녀야 하는 자기의 뒷그림자는 추한 모습이다. 불의는 부정을 두둔하지만, 양심은 부정을 용인하지 않는다. 양심의 편에 서면 정의는 고독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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