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 항일투사 박원효(朴源孝)
진주성-진주 항일투사 박원효(朴源孝)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13 17:2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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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 항일투사 박원효(朴源孝)

박원효(朴源孝)선생은 경남 진주시 내동면에서 숭덕전 참봉(參奉) 박재순의 손자요, 진사 박흥석(朴興錫)과 전주 최씨의 슬하에 태어났다. 박원효 선생은 진주공립보통학교(현 진주초등학교)를 1924년 3월 24일 제 13회로 졸업하였다. 통상 24회 졸업생으로 기록되었다. 어려서부터 영리하여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는 담임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서울의 중앙고보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6.10만세 사건에 가담하여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고 귀향했다.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영어보습학교에 진학해 수업을 받다가 모친께서 별세하신 후 부친도 극도로 몸이 약해져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할 수 밖에 없었다.

박원효 선생은 진주에서 비밀 단체를 조직하고 대중운동을 지도하였다. ‘한국사회주의 운동 인명사전’에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소개되었다. ‘진주 출신으로 1931년 7월 진주 소비조합 발기인이 되었다. 1932년 1월 경남남부적색 노동조합 건설위원회 반제구원부 책임을 받았다. 그 해 2월 사회주의 혁명을 선동하는 격문을 살포한 혐의로 일경에 검거되어 1933년 3월 징역 1년형이 선고되었다’

투쟁력이 강한 강두석, 강병창, 권대형, 강병도, 박수명, 장호관 등과 교제하며 각기 부서를 정하고 투쟁하며 점차 대중속으로 파고 들었다. 이 사건으로 모두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재판을 받게 된 것이다. 모두 대구복심법원에 항소하였고 1933년 4월 18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다음에도 애국동지들을 모아 시국에 대하여 토론하고 자나 깨나 조국의 독립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박원효 선생은 1935년 5월 동아일보 진주지국 신문기자로 임명되었다. 약 10개월간 기자직을 수행했으나 고문 후유증이 심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참아 내기가 어려웠다.

애국동지 박수명이 1942년 1월 29일 역시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고 박원효 선생도 1942년 7월 20일 37세 때 세상을 떠났으니 순국이다. 민족과 나라를 위해 하나 뿐인 목숨을 바친 것이다.

정부는 2003년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8년 4월 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2002년 8월 진주시 금산면 갈전리에 필자가 ’진주항일투사추모비‘에 다음과 같이 깊이 새겨 두었다.

‘반제동맹과 노동조합을 조직해 활동 중 체포 1년형 옥고 박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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