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3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0.25 13:2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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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3


2015년 9월, 나는 약간 설레고 있었다. 오랜만이었다.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일본인 후배 M교수와 함께 지도교수 W교수님의 자택을 방문했다. 강연 차 센다이의 도호쿠 대학을 갔다가 다음 예정지인 교토로 가던 도중에 교수님 댁에 잠시 들르기로 한 것이다. 교수님은 이미 그 수년 전에 작고하셨다. 사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다.

W교수님과는 청춘 시절 10년 가까운 세월의 추억담이 있고 그 일부를 글로 쓴 적도 있지만, 사모님에 대한 추억도 없는 것이 아니다. 1980년 4월 벚꽃 피던 계절에 처음 뵌 사모님은 그 벚꽃 같은 인상의 전형적인 일본여성이었다. 깍듯하고 단정하고 친절했다. 뵐 때마다 항상 키모노 차림으로 남편의 제자들을 맞아 환대했고 말투에서도 몸에 밴 교양이 느껴졌다. 들은 바로는 남편을 따라간 독일에서도 그런 교양으로 사람들을 대했고 그들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남긴 듯했다.

그로부터 30수년, 사모님은 늙으셨지만 고운 자태는 그대로셨다. 평소에는 간편한 차림으로 지내는데 오늘은 나를 위해 특별히 키모노를 꺼내 입었노라 웃으며 말씀하셨다. 고맙고 황송했다. 그 환대가 인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준비하신 맛있는 음식도 30수년 전 그대로였다. 우리 제자들은 명절 때마다 방문해 그 음식을 대접받았었다. 학창시절, 청춘의 추억들이 고스란히 되살아났다.

그동안의 안부를 나눈 뒤 잠시 자리를 떴던 사모님은 누렇게 색이 바랜 노트뭉치를 들고 오셨는데 1980년 내가 처음 댁을 방문했던 날의 일기였다. 30수년 전이다. 거기 앳된 유학 새내기인 나의 인상이 적혀 있었다. 감동이었다. 결혼 후 어린 딸을 데리고 방문했던 날의 기록도 거기 있었다. 일본인의 놀라운 기록문화를 다시 한 번 여실히 확인했다.

이런저런 옛이야기가 오고 간 다음 사모님은 느닷없이 “남편의 서재에 가본 적 없었죠? 가보시겠어요?” 하며 나를 2층 서재로 안내했다. 교수님 생전의 상태 그대로라고 설명하셨다. 시간여행을 하는 듯 묘한 느낌이었다. 그 서가엔 두 분의 신혼초의 사진도 놓여 있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젊은 교수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뜻하지 않은 췌장암으로 교수님이 일찍 세상을 떠나신 후 자녀가 없는 사모님은 교수님의 인생 제2부를 혼자서 이어가는 느낌이었다.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사모님은 ‘집 한채 값’이라는 비용을 들여 교수님의 ‘저작집’, ‘전집’을 발간하셨고, 교섭 끝에 시립도서관에 교수님 특별 기념실도 마련하셨다. 말이 그렇지 세상 떠난 남편을 위해 그렇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몸집은 작은 분이지만 진한 애정을 넘어 ‘인간의 크기’가 느껴졌다.

사모님의 안내로 집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사찰 부속 묘지에 가 교수님의 비석 앞에 향을 올렸다. 사모님은 매일 오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간편한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이 묘소에 와 비석을 닦는다고 하셨다. 그게 일과라 했다. 일본에서는 드물지 않은 풍경일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에 잔잔한 감동이 없을 수 없다.

40수년 전, 동기 오에 겐자부로와 글 솜씨를 다투던 한 철학도 J군과 앳된 한 소녀 K양의 분홍빛 첫 만남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학교 뒤 우에노 공원의 벚꽃길을 함께 걸었을 것이고 결혼 후 기나긴 인생길을 역시 함께 나란히 걸었을 것이다. 자녀가 없는 쓸쓸함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학자로서 일가를 이룬, 그리고 유럽에까지 이름을 알린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명절 때면 일군의 제자들을 대접하면서 사모님은 자랑스럽고 행복했을 것이다.

그분들의 삶의 굴곡에 대해서는 별로 들은 바가 없다. 사람의 일일진대 전혀 없기야 했겠냐마는 혼자 남은 사모님의 인생 2막을 보면 그분들의 인생이 참으로 존경스러운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리 제자들의 가슴속에는 대단한 학자였던 교수님뿐만 아니라 사모님이라는 또 하나의 별이 함께 빛나고 있음을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면 꼭 알려드리고 싶어진다. 교수님이 만일 그런 말을 들으신다면 “헤~에 그랬어?” 하고 그 특유의 표정으로 능글능글 웃으실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아름다운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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