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신과 인간관계의 새로운 만남
아침을 열며-신과 인간관계의 새로운 만남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1.09 17:1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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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환/국학강사
김진환/국학강사-신과 인간관계의 새로운 만남

당신은 신을 어떻게 보는가. 신을 모시는가, 신을 두려워하는가, 신을 편안하게 여기는가. 누가 신을 어떻게 여기느냐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화두이다. 지금의 인류는 신에 대한 관점정리를 더욱 명료하고 뚜렷하게 하지 않으면 지금까지 인류가 흘린 피보다 더 많은 양을 흘려야 할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념이라는 마약 같은 신념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가 영적인 자각을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적인 자각의 핵심은 인간이 스스로 영적인 존재임을 알고 자신 안에 감추어진 신성을 발견하고 그의 메시지를 듣고 일상생활에 활용하는 것이다. 현실에 쓰이지 않으면 무엇이든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성을 발견함으로써 인간은 신과 인간 사이의 불필요한 틈을 극복하고 더욱 가까워짐과 동시에 신과 인간, 즉 개체성과 전체성이 통합된 조화로운 정체성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들과 별자리를 보고 마냥 존경하거나 경외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저 참 아름답다고 말하고 느낄 뿐이다. 신이 만든 우주와 인간은 전체이면서 개체성이 있고 그 둘은 어떤 조건도 계약도 없다. 그저 큰 우주의 큰 질서 속에서 찬란하게 빛날 뿐이다.

우리 안에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신성이라고 한다. 탐욕에 찌들었거나 영안이 막힌 사람은 단지 그것을 보지 못할 뿐이나 누구든 그것이 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며 자비이며 평화이고 사랑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자신의 의식을 지배해온 지역 신, 민족 신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현재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전쟁 대부분은 자기 종교가 더욱 좋다, 내지는 내 종교 아니면 다 필요 없다는 지역 신과 민족 신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한 편협한 의식 때문에 일어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그런 종교적 감정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숨져갔다. 통탄할 노릇이다. 종교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람 목숨이며 인간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배우면서도 나와 다르면 다투거나 총격을 가한다. 이러한 시대는 신앙이나 이성의 시대가 아니라 내 종교를 앞세운 또 다른 힘겨루기였고 그 에너지는 여전히 우리 곁에 그대로 있다.

하지만 그런 아픔으로 인해서 우리 안의 영성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하였다. 선선하면서 습기가 많이 찬 곳에서 질 좋은 버섯이 난 형국이다. 양심과 신성의 시대가 눈을 뜨기 시작하였고 신학이나 과학 주도의 시대가 아니라 깨달음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신을 두려워하여 예속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을 바로 알고 활용하는 용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기본적으로 신은 인간이 만들었기 때문에 인간의 창조물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없으면 자연신도 사라진다. 그래서 “저 사람은 신과 같다”라는 용어가 나온 것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었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니 필요하면 없애도 된다. 더러 개종하는 이가 있다. 개종한다고, 즉 앞에 모시던 신을 버린다고 해서 벼락을 맞는 일은 없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종교라는 신념체계를 구성하는 정보로서의 신이다. 이것이 지금까지 인류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지역 신, 민족 신들의 실체이다. 이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의 믿음에 의해 그 생명이 유지되는 정보이고 관념이다. 이 관념에 수많은 사람의 발목이 잡혀있다. 그 종교는 일정한 규율이 있고 나름의 방식이 정해져 있다.

어느 시골에서 일어난 일이다. 손이 없는 날, 즉 좋은 날을 택하여 이 할머니는 오래된 농을 치우고 새 농을 사들였다. 농이 마당으로 들어오는 날,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해 소금을 구하여 들어오는 농과 업자를 향해 거침없이 소금을 집어 들고 손으로 뿌렸다. 소금을 맞은 업자는 가만있지 않고 고소를 하기에 이르렀다. 나중에 이 할머니가 손이 닳도록 사과를 한 후에 화해는 되었지만 이렇게 종교는 할머니의 의식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사례는 모양과 규격을 달리하면서 나라 간의 전쟁도 불사하게 된다. 우리는 스스로 신이라는 관념적 정보를 만들고 그 정보가 우리의 몸과 뇌를 사용하도록 시간과 경비를 내어주고 또한 그 정보가 움직이도록 필요한 에너지를 수시로 제공한다. 자신이 하는 이러한 일들을 알지 못한 채 우리는 신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종교로 정의할 수가 없고 종교에 속박되지 않는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영원한 생명이다. 이것은 누구를 지배하려고 하지도 않고 누구의 섬김도 받으려 하지 않는 신이다. 이것은 모든 생명이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가치를 실현하도록 허락하는 조화의 법칙이다.

밤하늘에 하염없이 쏟아지는 별들을 바라본 적이 있는가. 은하수 옆에서 찬란히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는가. 너무도 아름답고 황홀한 마음에 가슴이 환해져 본 적이 있는가. 눈에 보이는 별들이지만 그 별들은 형언할 수 없는 거리에서 서로 떨어져 있으며 그 거리는 몇 억 광년을 가도 만날 수 없는 별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우리 눈에서는 가까운 친구처럼 보이는 듯 하게 보이는 것이다. 말로서 표현되지 않는 창공에서 그저 홀로 빛나는 그 별들이 바로 홀로 스스로 존재하는 우리와 다를 바가 없고 그 안에서 빛이 나는 신성이 있듯이 별들도 밤하늘을 빛으로 수놓는 것이다. 우리가 별들을 바라보듯 별도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나처럼 빛이 나는 신성이 그대들 가슴속에 있다고 하면서, 대낮인 지금도 그 별들은 저녁 밤을 기다리면서 그 찬란함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고 허공이며 도이다. 지금 다시 살아나고 있는 한자 중의 조화주 하나님 신이라는 글자가 있다. 귀신 신자가 아니라 조화로운 법칙을 이른 글자인데 보일 시자, 안을 포와 해일, 달 월을 포함하는 글자이다. 즉 이 글자가 전하는 뜻은 천지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존재하는 모든 것 너머에 있으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함께 존재하는 모든 곳 속에 있는 신이다. 이것이 조화의 신이고 평화의 신이다.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인류의 화두는 평화이다. 어떻게 하면 평화로울까 고민해야 할 시기이다. 나만 우리나라만 강해지고 부유해지면 평화로울까. 남이나 타국은 넘어지고 쓰러져도 우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인가. 정말로 평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이제 우리는 평화라는 기준으로 우리의 신들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가 부르는 그 신이라는 정보들이 지금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있는가? 지구평화를 실현하는 데 어떤 이바지를 하고 있는가. 이런 기초적이고 원론적인 토론을 시작해야 한다.

자기 내면의 참 평화뿐만 아니라 지구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나를 구성하는 관념적인 정보인 가아를 버리고 나의 생명의 실체인 진아를 찾는 것처럼 이제 우리는 지구의 당면한 문제해결을 위해서 실체의 신을 찾아야 한다. 실체의 신은 법칙으로 존재한다. 순천자는 흥하고 역천자는 망한다는 말처럼 세상 법을 어겨도 처벌을 받는데 하늘의 법칙을 어기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는 뻔하다.

인류는 하늘의 법칙을 어기는 일을 지난 2000년 동안 해왔기에 범지구적 위험에 빠져들고 있다. 이 문제의 해답은 우리 인류가 가지고 있다. 좀 더 가까이 표현하면 우리가, 내가 가지고 있다. 우리 몸도 자연의 섭리에 의해 만들어졌듯이 섭리를 거스른 몸은 반드시 병이 들게 되어있다.

섭리를 회복하는 일은 바로 우리 안에 신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그 신성의 한 가운데에는 양심과 순수한 본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신성을 자각함으로써 신과 인간, 하늘과 땅, 물질과 정신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고 분리된 개체로서의 육체라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다. 또한, 모든 존재의 근원이 하나임을 앎으로써 민족과 사상과 종교에 의해 만들어진 인위적인 차별과 차이를 넘어서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신인합일 상태이다.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소통하는 시대가 왔다. 참으로 신나는 시대가 우리에게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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