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5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5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1.16 17:3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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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5

오랜만에 고향 A시를 방문했다. 중학교를 서울로 진학한 후 방학 때마다 귀성을 하며 그때마다 설레던 고향이지만 7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 아련한 향수는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청춘시절에 좋아하던 저 헤르만 헤세의 소설 ‘청춘은 아름다워라’의 주인공 헤르만과 비슷한 그런 설렘을 거기에 갈 때마다 느끼게 된다. 아마도 거기엔 유년기와 성장기의 이러저런 추억들이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일종의 시간창고랄까. 고향이란 대개 그런 것이다. 거기엔 아련한 파스텔톤의 커튼이 쳐져있다.

A역에 내리면 그 바로 앞에 하늘을 찌를 듯한 높이로 공장의 굴뚝이 하나 솟아있다. 공장은 이미 오래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어쩐 사연인지 그 굴뚝만은 무슨 기념물인양 그 자리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그곳이 소위 ‘먹자거리’로 유명한 모양인데 예전엔 그 일대가 다 ‘KS섬유’라는 회사 터였다. 그 집은 A시 최고의 부자였다. A시의 첫 ‘자가용’ 승용차도 바로 그 집 소유였다.

어릴 적 아버지는 가끔 그 사장님인 KTS어르신을 입에 담았다. 거의 A시의 이병철 같은 이미지였다. 대단한 수완의 사업천재였다. 그 시절 공장을 갖고 자기 사업을 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그 시도 자체로 충분히 존경의 대상이 될 일이었다.

그렇게 그 집은 여러 가지로 주목대상이었는데, 당시 아이들에게도 그 집은 늘 화젯거리였다. 그것은 그 또래의 자녀들 때문이었다. 그 댁에는 7공주를 포함한 9남매가 있었는데, 유전자가 특별했던지 하나같이 그 미모와 두뇌가 뛰어났다. 그 7째 공주님이 나와 동기였고 8째가 내 동생과, 첫째와 4째와 5째와 가 각각 내 형들과 동기였다. 그런데 이 딸들이 하나같이 다 백설공주급이었다. 게다가 공부도 거의 다 최고우등생이었다. 동기인 7째도 나와 전교에서 1, 2등을 다투었다. 6학년 때는 전교어린이회 회장과 부회장으로 함께 활동했는데 바로 옆에 있어도 그녀는 항상 뭔가 별세계의 사람 같은 느낌이었다.

KTS어르신은 실력도 당연히 뛰어났겠지만 타고난 복도 보통은 아닌 셈이다. 아홉 자녀가 하나같이 이렇게 우수하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그런데 다산 정약용이 말한 ‘소완복(少完福)’처럼 완전한 복이란 드문 법인지, 이 분은 뜻밖의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 과도한 노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중학교부터 서울로 유학을 한 탓에 나중에 풍문으로 그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연히 동기였던 그 7째 NY가 떠올랐고 염려가 됐다. 특별한 친구였으니까.

내가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그 이후’가 당연히 있었다. 그것을 나는 60이 넘은 나이에 전해 들었다. 그것은 이미 A시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어르신의 별세 이후 공장은 첫째가 이어받았으나 시대의 흐름 속에서 결국 문을 닫았다. 그리고 홀로 남은 모친이 남은 자녀들을 모두 끝까지 뒷바라지 했다. 무려 아홉이다. 그 분은 그 분대로 여걸이었던 셈이다. 그 소상한 전모는 나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아는 7째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명문 여고와 명문 여대를 나와 한국을 대표하는 저명 무용가가 되었고 자신의 무용단을 이끌고 전 세계를 무대로 지금도 맹활약을 하고 있다.

동생의 친구였던 8째는 역시 명문 여고와 명문 여대를 나와 독일과 일본에 유학했고 일본에 자리를 잡아 방송에서 맹활약을 하며 국위를 선양 중이다. 그리고 나와 전공이 같다는 이유로 언니인 6째를 7째로부터 소개받아 친구가 되었는데 이 친구도 역시 최고 명문대를 나와 미국 최고의 명문대에서 유학한 후 홍콩 명문대에서 오랫동안 교수로 활동했다. 다른 형제자매들도 다 엇비슷하게 잘 풀렸다고 전해 들었다. 이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첫째와 9째 두 아들들은 특별한 인연이 없어 자세한 소식을 모르지만 그 따님들은 가끔씩 페이스북에서 서로 안부를 전하는 것을 지켜본다. 아름다운 풍경이 아닐 수 없다.

A시를 방문하는 외지인들은 그 역 앞에 생뚱맞게 솟아있는 공장굴뚝을 의아하게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고향사람들은 그 굴뚝을 보며 대단한 사업가였던 KTS어르신과 그 사모님과 그 아홉 자녀들의 찬란한 삶을 떠올린다. A시의 각 세대들에게 그 따님들은 한결 같이 백설공주로 기억되고 있다. 그들의 남은 시간들도 ‘그리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마무리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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