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6
아침을 열며-사람들 이야기-장면6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1.11.29 17:3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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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6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거의 매일 최소한 10건 이상의 문자를 받아본다. 요즘은 쓸데없는 스팸문자도 많다. 삐리릭 알림소리에 습관적으로 열어보다가 응? 하고 갑자기 손이 멎었다. ‘부고’표시가 앞에 붙어 있었다. 그 이름에 나는 경악했다. S대 C박사 본인별세. 손만이 아니라 전신이 얼어붙었다. 발신번호가 본인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남긴 전화 주소록에 내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족이 그걸로 연락을 한 것이리라 짐작되었다. 잠시 후 메일로도 연락이 왔다. 학회에서 보낸 것이었다.

C박사는 학회에서 만난 후배교수다. 60을 갓 넘겼으니 빨라도 너무 빠르다. 믿어지지 않았다. 빈소가 멀었지만 안 가볼 수 없었다. 문상을 다녀왔다. 나이가 드니 이런 건 이제 너무나 흔한 일상사지만, 젊은 후배교수가 먼저 갔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학회에서 특별히 가까웠고 특별히 아끼던 친구였다.

부인과 아들딸은 처음 봤다. 그가 늘 해주던 이야기와 그 인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인을 포함해 이 4가족의 인상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선량함’이었다. 그의 영정을 보는 순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에 그와의 이런저런 추억들이 어른거리며 비쳐왔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 초 학회를 처음 결성했을 때였다. 그의 첫 인상도 ‘선량함’이었다. 학위를 취득하기 전이었지만 그의 실력은 이미 어떤 괄목할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와의 대화는 언제나 유익하고 즐거웠다. 학문에 인품이 보태져 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명문대학에 몸담고 있었지만 그는 ‘잘난 척’이 없었고 겸손했다. 나는 그 점을 특별히 높이 평가했다. 남동생이 없었던 나는 그를 동생처럼 여기며 아꼈다.

그런데 참 취직이 쉽지 않았다. 만년 강사였던 그는 여러 번 가장으로서의 부담과 묵묵히 뒷바라지해주는 부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곤 했다. 아마도 그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독일 현지로 유학을 떠났다. 여러 상황이나 사정을 봤을 때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학문도 학문이지만 그게 ‘취직’에 도움 될 거라는 간절한 기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독일로 떠나는 그의 전도를 축복해 줬다.

그 2년 후던가? 나에게도 연구년이 주어져서 그가 머물던 독일 F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는 우리 전공의 메카였다. 반갑게 재회했다. 방을 구하는 일부터 정착할 때까지의 온갖 귀찮은 일들을 그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지는 비슷한 경우를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나도 그걸 아는 터라 그의 도움은 특별히 고맙고 미안했다. 수업이 없을 때 우리는 학교 앞 주점에서 자주 만났다. 독일의 대학 앞이 대개 그렇지만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철학도 안주거리였지만 인생살이의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취직을 못해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그 미안함과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거하게 취한 그가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나중에 죽어서 혹시라도 신을 만나게 되면 제대로 한번 따져볼 생각이예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하하” 맞다, 맞아, 나도 격하게 공감했다. 신도 아마 그 정도의 불경은 애교로 봐주시리라 믿는다. ‘하늘이 장차 대임을 맡기고자 할 때는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고’ 어쩌고 하며 맹자는 말했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그는 성공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딴 후 귀국했지만 끝내 그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늦가을인데도 바람은 이미 겨울이었다. 한없이 선해보이던 눈빛으로 나를 배웅하던 그 ‘제수씨’의 모습이 귀갓길 내내 마음에 무거웠다. 그나마 잘 자란 아들딸이 번듯한 회사에 취직을 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니 약간은 위안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남은 엄마에게 효도하면서 아빠가 해주지 못한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언젠가 그가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던 날 그의 학위통과와 나의 귀국을 위해 간단한 파티를 열어준 그의 지도교수 H박사가 옆방의 동료교수에게 하던 말이 다시금 기억난다. “당신, 한국인 제자 있어? 오늘 학위 한 이 제자도 한국인인데 이 친구 정말 우수해, 최고야” 하고 ‘엄지 척’을 했었다. C도 옆에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의 선량한 미소가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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