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사람들 이야기-장면6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다. 거의 매일 최소한 10건 이상의 문자를 받아본다. 요즘은 쓸데없는 스팸문자도 많다. 삐리릭 알림소리에 습관적으로 열어보다가 응? 하고 갑자기 손이 멎었다. ‘부고’표시가 앞에 붙어 있었다. 그 이름에 나는 경악했다. S대 C박사 본인별세. 손만이 아니라 전신이 얼어붙었다. 발신번호가 본인의 것이었다. 아마도 그가 남긴 전화 주소록에 내 이름이 있었던 모양이다. 가족이 그걸로 연락을 한 것이리라 짐작되었다. 잠시 후 메일로도 연락이 왔다. 학회에서 보낸 것이었다.
C박사는 학회에서 만난 후배교수다. 60을 갓 넘겼으니 빨라도 너무 빠르다. 믿어지지 않았다. 빈소가 멀었지만 안 가볼 수 없었다. 문상을 다녀왔다. 나이가 드니 이런 건 이제 너무나 흔한 일상사지만, 젊은 후배교수가 먼저 갔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학회에서 특별히 가까웠고 특별히 아끼던 친구였다.
부인과 아들딸은 처음 봤다. 그가 늘 해주던 이야기와 그 인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본인을 포함해 이 4가족의 인상을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것은 ‘선량함’이었다. 그의 영정을 보는 순간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눈물이 맺혔다. 그 눈물에 그와의 이런저런 추억들이 어른거리며 비쳐왔다.
그런데 참 취직이 쉽지 않았다. 만년 강사였던 그는 여러 번 가장으로서의 부담과 묵묵히 뒷바라지해주는 부인에 대한 미안함을 토로하곤 했다. 아마도 그 부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늦은 나이에 독일 현지로 유학을 떠났다. 여러 상황이나 사정을 봤을 때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학문도 학문이지만 그게 ‘취직’에 도움 될 거라는 간절한 기대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독일로 떠나는 그의 전도를 축복해 줬다.
그 2년 후던가? 나에게도 연구년이 주어져서 그가 머물던 독일 F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거기는 우리 전공의 메카였다. 반갑게 재회했다. 방을 구하는 일부터 정착할 때까지의 온갖 귀찮은 일들을 그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그게 얼마나 귀찮고 번거로운 일인지는 비슷한 경우를 당해본 사람만이 안다. 나도 그걸 아는 터라 그의 도움은 특별히 고맙고 미안했다. 수업이 없을 때 우리는 학교 앞 주점에서 자주 만났다. 독일의 대학 앞이 대개 그렇지만 맥주 한 잔을 시켜놓고 몇 시간이고 이야기를 나눈다. 철학도 안주거리였지만 인생살이의 속 깊은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그는 아내와 아들딸에 대한 사랑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취직을 못해 고생을 시키고 있으니 그 미안함과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언젠가 거하게 취한 그가 그 특유의 미소를 띠며 “나중에 죽어서 혹시라도 신을 만나게 되면 제대로 한번 따져볼 생각이예요.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내게 이런 고생을 시키는지, 하하” 맞다, 맞아, 나도 격하게 공감했다. 신도 아마 그 정도의 불경은 애교로 봐주시리라 믿는다. ‘하늘이 장차 대임을 맡기고자 할 때는 먼저 그 심지를 괴롭히고’ 어쩌고 하며 맹자는 말했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 그는 성공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학위를 딴 후 귀국했지만 끝내 그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사랑하는 가족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다.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늦가을인데도 바람은 이미 겨울이었다. 한없이 선해보이던 눈빛으로 나를 배웅하던 그 ‘제수씨’의 모습이 귀갓길 내내 마음에 무거웠다. 그나마 잘 자란 아들딸이 번듯한 회사에 취직을 했고 결혼을 앞두고 있다니 약간은 위안이 되었다. 그 아이들이 남은 엄마에게 효도하면서 아빠가 해주지 못한 행복을 줄 수 있기를 나는 빌고 또 빌었다.
언젠가 그가 독일에서 학위를 마치던 날 그의 학위통과와 나의 귀국을 위해 간단한 파티를 열어준 그의 지도교수 H박사가 옆방의 동료교수에게 하던 말이 다시금 기억난다. “당신, 한국인 제자 있어? 오늘 학위 한 이 제자도 한국인인데 이 친구 정말 우수해, 최고야” 하고 ‘엄지 척’을 했었다. C도 옆에서 쑥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그의 선량한 미소가 정말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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