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보훈이야기-2.8 독립 선언을 상기하면서
든든한 보훈이야기-2.8 독립 선언을 상기하면서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2.06 17:10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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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용/경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장
이병용/경남서부보훈지청 보훈과장-2.8 독립 선언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독립 운동하면 1919년에 있었던 3.1 만세 운동을 대표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대륙 문화와 해양의 문화가 겹치는 곳으로 우리 민족사는 이런 환경에서 외부 세력의 침략에 대해 저항하고 고난을 이겨나가는 역사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저들이 외세에 의해 받은 개방을 우리에게 요구하면서 강화도에서 운양호 사건으로 압박을 가해왔다. 1876년 맺은 강화도 조약은 불평등 조약이고 외세에 의해 이뤄진 것이며 탄압의 시작이었다. 이후 일제는 우리에게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면서 굴종을 요구하고 급기야 1905년 11월에는 우리의 주권마저 강제로 뺏는 을사조약을 체결하면서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였다. 이어 1907년에는 고종의 강제 퇴위, 정미 7조약, 군대의 강제 해산을 시키는 등 탄압을 하였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의병 전쟁이 시작되었고 1894년부터 시작된 의병은 1907년도 후반 본격화 되었다. 당시 의병은 5년간 15만여 명에 이르고 1907년 후반부터 2년간 순국한 분만 2만 여 명이 넘었다. 지역 주민, 지식인, 유학자, 농민 등 다양한 계층에서 참여하여 나라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 분들이다.

1909년 10월에는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고, 계속된 저항에서 1912년 우리민족 단체인 신민회를 말살하고자 지도자급 105인을 투옥하는 등 탄압을 해왔다. 이런 과정에서는 우리는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1919년도에는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고 전국 참여시군 211개소, 집회 1,542회, 인원 2,023천 여 명에 달했다.

3.1 만세가 널리 알려진바 같지만 그 도화선이 된 1919년 2월 8일 일제의 수도 동경에서 유학중이던 한국인 남·여 학생들의 한 독립선언을 우리는 기억한다. 당시 조선청년독립단은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등이 참여하였고, 독립선언의 현장에는 600여명이 모였다. 최팔용은 대표로서 “우리 3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얻은 세계 만국 앞에 독립됨을 선언하노라” 하고 한일 합방이 우리의 의사에 반한다고 선언하였다.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면서 세계 여러 나라는 평화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자는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프랑스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렸고, 월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다”는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런 시대적 조류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는 여러 선각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일제의 갖은 만행과 압박에도 꿋꿋하게 우리나라의 독립을 갈망하던 분들에게 깊이 머리 숙인다. 일제의 심장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당당히 저들 앞에 서서 외쳤던 함성을 우리는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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