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평가에 대한 평가
아침을 열며-평가에 대한 평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4.13 16:5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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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
이수정/창원대 명예교수·철학자-평가에 대한 평가

사람들이 의외로 잘 모르는 중요한 철학적 주제가 하나 있다. ‘평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것들을 평가하고 그리고 평가받는다. 누구는 이렇고 누구는 저렇다, 이것은 어떻고 저것은 어떻다. 여간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이 아니지만 결국은 ‘좋다’와 ‘나쁘다’로 정리된다. 그 주체가 누구고 그 대상이 누구든 평가는 평가받는 사람의 삶을 좌우한다. 대학도, 정부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평가라는 것은 가벼울 수가 없다. 엄중한 행위인 것이다.

사안에 대한 평가도 그렇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는 특히 그렇다. 시험도 인사도 그런 것에 해당하고 선거도 일종의 평가에 해당한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세평도 결국은 그런 부류다. 공자를 두고 ‘상갓집 개’라고 한 말도 그렇고 예수를 두고 ‘목수의 아들이 아니더냐’ 라고 한 말도 결국 그런 평가의 일종이다.

그런 평가가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평가는 결국 판단이고 그것에는 나름의 기준이 작용한다. 우리는 그 기준에 대해 철학적인 검토를 해본 적이 있을까? 별로 들어본 바가 없다. 살아본 사람은 알지만 사람들은 자기 평가가 무조건 다 옳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아니다. 반대인 경우도 많다. 심지어 평가를 받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칼자루를 쥐고 함부로 평가를 하는 경우도 무수히 많다.

세상은 아주 아주 엉터리다. 훌륭한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욕하기도 하고 고약한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느냐에 따라 어떤 사람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반대로 달라지기도 한다. 이런 경우를 우리는 삶의 실제 맥락에서 너무나 많이 경험한다. 사람들은 이런 걸 잘 모른다.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평가들이 난무하고 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하는 평가가 기사나 SNS를 비롯해 삶의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엉터리 평가도 너무나 많다. 선과 악, 시비정사(맞고 틀림, 옳고 그름)가 뒤집힌 경우도 부지기수다.

정치적인 사안, 정치적인 인사들에 대한 평가는 특히 그렇다. 동일한 인물, 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려 대립한다. 심지어 사법 판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에 들면, 우리 편에게 유리하면 옳고 그게 아니면 무조건 그르다. 그 서로 엇갈리는 평가 때문에 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 사이도 혹은 심지어 가족 간에도 불편과 불화가 생겨난다. 이른바 진영의 논리에 동조하지 않으면 적이고 반동으로 치부한다. 나라가 완전히 두 쪽이 나 있다. 국가적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이 평가라는 것을 평가해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기준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보통 ‘나의 생각’ ‘나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그것이 ‘객관적 정의’라고 여기는데, 그 ‘객관’과 ‘나’라는 것의 정체가 사실 수상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의 영향이, 혹은 이익이 알게 모르게 그 ‘나’라는 것에 작용하여 ‘나’의 생각처럼 되어 버린 것임을 사람들은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한 번쯤은 그것을 냉정한 이성으로 검토하고 반성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른바 ‘건전한 이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신뢰가 있었다. 데카르트나 칸트나 헤겔 같은 이에게 귀를 기울이기도 했었다. 지금은? 그들의 희미한 그림자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철학으로 돌아가자!”라고 아무리 외친들 우리의 이 거친 황야에서는 돌아오는 메아리도 없다. 도리 없다. 기대를 못해도 그냥 외칠 수밖에 없다. 객관적-보편적 시비정사 그 자체는 모든 논란의 저편에 외외히 있는 거니까. 아마도 저 공자나 부처나 소크라테스나 예수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이다. ‘사랑’처럼, ‘용서’처럼, 모든 위대한 것의 본질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것이 숙명처럼 내포돼 있다.

모든 평가는 판단이고 그것은 결국 선택이다. 그 선택의 시비정사는 결국 그 결과만이 판가름한다. 기다려보자. 누구의 평가가 결국 옳은 것이었고 그른 것이었는지. 진영의 외침이 아무리 떠들썩한들, 그것이 나라의 현실을 좌우하지는 못한다. 그 평가는 결국 우리 자신의 불끈하는 감정이 아닌, 뭇 외국인들의 고요한 눈에 아주 자연스럽게 비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각종 지표로 수치화될 것이다. 아첨꾼의 혀가 아무리 ‘임금님 멋지십니다’라고 말해도 벌거숭이는 결국 벌거숭이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평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앞이냐 뒤냐, 위냐 아래냐, 결국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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