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정신의 계승
진주성-진주정신의 계승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7.20 16:5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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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정신의 계승

진주 정신이라면 행정구역상 진주시(진양군)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고 서부경남 대부분 거창에서 사천. 하동. 남해까지 해당되는 진주목을 두고 진주정신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진주정신이라면 외세를 물리친 훌륭한 업적과 내부의 적에 대항해 온 민중들의 굳건한 의식을 의미할 것으로 본다.

가야국의 일부 또는 백제의 일부였을 때 부터 고유한 정신적 기초가 되었을 것이나 신라에 귀속되었으므로 그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다.

진주는 남부의 중심지이고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서부경남의 중심권에 속하였으므로 진주 정신은 서부 경남의 정신이며 진주의 승패는 서부 경남의 승패와 연결되지 않을 수 없다.

항일투쟁만이 유일한 정신이라고 단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외세에 대항해 온 끈질긴 힘이 존속해 온 것은 사실이다.

진주는 물론 이 나라 이 민족의 정신적 지주를 형성한 분으로 강감찬, 강이식, 허공진, 정온 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현종 9년 거란 장수 소배압이 대군을 이끌고 침입할 때 대원수로 귀주에서 거란족을 진멸한 일은 유명한데 이 때 부원수는 강민첨 장군이었다.

상서 좌사낭중 하공진은 고려 현종 때 외교관이었다. 거란족이 대거 침입할 때 전진에 들어가 교섭하여 적의 진격을 막았고 연경에 끌려가 불복하다가 항사한 충신이었다. 이와 같은 애국 충정은 임진왜란 때 김시민 장군의 군병 3천여 명으로 왜적 2만을 물리친 것으로 계승되었다.

또 이어 김천일.황진.최경회.김준민.장윤.최기필.이광악 등 어려 장수들이 생사를 건 전투는 잊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제말. 제홍록 숙질간의 전사도 훌륭했으며 의기 논개의 거룩한 희생은 여성들의 항일 애국 정신을 옹호하는데 일조했다.

1862년 유계춘. 김수만 등의 진주농민항쟁은 전국적인 농민전쟁. 노동운동의 시원이 되어 봉건제의 해체를 진전시키게 된다.

1908년 수곡면 출신 유명국. 손기혁. 노응규, 정한용 의병장은 진양군과 지리산 일원에서 수만여 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30여 차례 투쟁했다.

1919년 3월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전국 최고의 인원 3만명을 동원한 투쟁은 길이 빛날 것이다.

광림학교와 시원여학교 악대원과 악기가 진주시내에서 큰 역할을 감당했다. 국채보상운동. 혈성단. 청년회. 신간회 등도 진주정신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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