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여성들의 국채보상운동(3) 기생 부용을 찾아오는 손님도 점차 줄어들고 주위의 눈총만 받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힘없는 부용은 견딜 수 없어 하동 지리산 인근으로 들어가 조용히 지내게 되었다.
수년간 암자에 기숙하던 부용이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신세가 되었다.
부용 기생이 젊고 이쁜 때는 하씨 성을 가진 장사꾼과 찾아와 동거했으나 노기(老妓)로 늙으니 헤어진 것 같다.
이때 진주 기방에 있을 때 친한 진주옥(珍珠玉)이라는 기생이 귀향해 인근에 살면서 부용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긍휼히 여겨 수백 량에 해당하는 가옥을 사주고 쌀 수십 석을 공급하여 생활토록 해 주었다.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진주옥에 대하여 칭송이 자자하더라. <경남일보 1910년 4월 12일> <진주지역 국채보상운동 2019년> 강주식의 막내아들 강만석 목사가 미국 오랜지주에서 최근에 귀국해 포상문제로 협의했으나 옥고 기록이 없어 성사되지 못했다.
진주지역 기생들의 경남여성보상회를 조직해 동참하게 되는데 기생들 명단은 다음과 같다.
국향 20원. 김소사 20원, 도홍 20원, 필향 20원, 봉란 10원, 계향 8원, 향심. 금연 6원씩, 옥연 5원. 봉희 4원, 부용, 매옥, 옥엽, 진옥, 오소사 -등은 각 2원씩 냈다. 총 142원을 수합했다. 20원은 현재 약 200만원. 진주는 북 평양, 남 진주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기생문화가 발전했으며 의기 논개(論介, 1574~1593) 사당에 산홍(山紅)기생이 지은 시(詩)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사천 다솔사 여성들이 3원 80전을 모았고 또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 1월 한일병탄 9개월 전에 일본 기생 2,830명이 입국했으며 조선 기생 2,468명이 있었고 진주교방에는 약 200명의 기생이 있었다.
국채보상운동은 곳간 열쇠를 가진 여성들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고 본다.
일본인이 가는 곳은 반드시 기생 또는 위안부가 동행했으니 5년 전에 일본 동경도지사가 전쟁하는 곳은 어디든지 위안소가 있었다는 말과 서로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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