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2)
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9.14 17:08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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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2)

두 학교가 소재한 봉래동과 평안동 일원에 거주하면서 항일투쟁에 앞장선 분들로 박진환, 강영호, 장두관, 김진환, 박태홍, 강주한, 강두형, 강주식, 유기영, 한규상, 김인숙, 김경택, 박용근, 박덕실, 박보교, 진창현, 서성실 등이며 이들은 동년배 또는 학교 선후배, 동네 친구들, 친구누이들이기 때문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또 이들이 진주청년회를 이끌었고 신간회 멤버로 활동하게 된다.

동아일보 1922.2.21.에 이상재 선생이 진주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창 청년”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실시할 때 진주청년회원까지 모두 듣고 감동을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이상재 선생과 함께 활동하는 홍명희, 안재홍 선생 등이 마산 신간회를 창립하신 후 강우석 선생의 안내로 진주에 왔을 때, 이미 준비된 상태, 즉 밥을 지어놓고 들기만 기다리는 상태였기에 1927년 10월 19일 역사적인 신간회 진주지회가 설립된 것이다.


신간회 진주지회장으로 추대된 박재표(1886~1951)는 내동면 삼계리가 본적이며 1920년 7월부터 진주청년회장이었다. 1922년부터 진주여교 설립발기인 겸 감사로 수억을 기부했고, 1925년에는 비봉산 일대 1만4천여 평을 기증하여 오늘날 진주여고로 성장케 했다. 또 노동대회 진주지부 회장(1920.6), 진주기근구제회 집행위원(1924.10)이었다. 금성초등학교 남서쪽 방향에 있던 축구운동장은 곧 자신의 논을 공용으로 기부한 땅인데 청소년들이 마음껏 뛰놀게 함으로써 장차 축구진주의 명성을 얻게 되었다.

운동장 북쪽에는 2층 목조건물이 있었으니 1층은 유치원으로 사용되고, 2층은 사무실 및 강연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신간회 창립 장소로 활용되었다. 박재표, 박재호, 박재수 3형제가 모두 항일투쟁과 자선 등의 업적을 쌓으신 분들인데 그와 같은 공덕 때문인지 알 수 없으나 직계후손 중에 대학교수 5명, 대기업사장, 판・검사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강두석에 의하면 박재표를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한 이유로 그의 선심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신간회 중앙위원 정태석의 영향을 받은 김의진은 사천읍 출신이지만 수년전부터 진주로 이주해 진주청년회에 가담 활동했으나 신간회가 창립될 당시에는 항일투쟁으로 대구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사천지회 설립의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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