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3)
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9.21 16:49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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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3)

1927년 10월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 선출된 조우제도 다양한 활동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웅변술과 문장능력은 그 누구도 따르지 못했다고 한다. 또 진주공존회(1923.5), 소작노동자대회(1922.9), 형평사 발기인 대회(1924.4), 천도교 청년회장(1923.3)으로 강연을 실시하고, <남선공론>사 주필과 진주유치원 학무위원, 동아일보 진주지국 기자, 진주농민조합 집행위원장 등으로 활약했다. 또 다른 중요이력으로 대구조선은행에 폭탄을 투척한 사건에 관련돼 2년간 감옥에서 고생한 것이다.


1927년 10월 창립 당시 간사로 선출된 강덕문(姜德文)은 진주노동공제회와 양화직공조합 전무이사 겸 평의원장(1923.5)이었다. 동아일보 1922년 11월 15일자, 1923년 6월 18일자 등에 의하면 천주교 청년회 강사로 초빙되어 “제2전선에 관한 노력”이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실시했고, 조선노동공제회에서 박순명, 김종범 등과 함께 “시대적 각성과 소작운동”이란 제목으로 강연했다는 내용도 있다.


1927년 10월 창립 당시 간사로 선출된 천용근(1897~1955)은 평안동 새미골에서 태어나 보통학교 성적이 뛰어나 천재가 났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과 재학 중 진주출신 김종범과 함께 일월회, 북풍회에 가입활동한 일도 있다. 대학졸업(1927년) 후 곧 귀국하여 신간회 활동을 시작했다. 1929년에는 강대창을 대신해 신간회 조직선전부 총무간사로 선출되어 신간회 본부 이관용 선생을 초빙하여 강연을 실시하기도 했다. 일경의 감시와 감독이 심해지자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서도 항일투쟁을 계속해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만주 봉천에서 신대륙사 봉천지부 기자로 활동했다.


유기영(1890~1951)은 남해군 남해읍 출신 변호사로 개업연도는 알 수 없으나 항일투사들을 위해 무료변론을 자청했었고, 조카 유덕천을 양자로 삼아 공부시키고 항일운동을 전개토록 뒷받침했다. 그는 1927년 10월 신간회 설립 당시 진주지회 간사로 선출되었고 진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1905년 11월 설립) 봉래동 진주교회 교인이었다.

1927년 10월 진주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된 이풍구(1987~1945) 변호사는 충남 대천(보령) 출신으로 진주법원 앞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항일지사, 동아일보 1930년 11월 13일자에 의하면 중요도시 순회좌담에 참석한 인물 중 박태홍, 백남훈, 허헌 등과 함께 진주발전을 위한 제언자로 등장한다. 충남 대천으로 이사간 후 1945년 8월 이후 생사불명이다. 유일한 아들 이정복은 교수, 학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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