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전도의 치욕(병자호란)
삼전도의 치욕(병자호란)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1.28 17: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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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곤/밀양동명고 교사ㆍ경남국학원 이사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淸)나라가 일어났다. 청나라는 오랑캐라고 불리며 천대받으면서 명나라에게 조공을 바쳤던 만주족이 세운 나라다. 이들의 뿌리인 여진족은 고려 초기만 해도 부모인 나라라며. 우리에게도 조공을 바쳤다.

그 당시 청나라의 인구는 120만 이었는데, 누르하치(청태종)라는 선각자가 나타나 6만의 팔기군 을 정예화 하여 중국을 통일했다. 명-청이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조선 조정의 의견은 임진왜란 때 도움을 준 명(明)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며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최명길과 김상현을 중심으로 결사항전을 주장한 척화론(斥和論)들의 주장이 대립했으나 결국 대의명분을 택하여 명을 도왔다. 승리한 청나라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조선을 침입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병자호란(조만朝滿전쟁)이다.
조정에서는 청나라가 기마민족 이므로 수전(水戰)에는 약하리라는 판단 하에 왕비와 왕실 가족들을 강화도를 피신시켰으나 청은 명나라에서 투항한 수군들을 대거 투입해 강화도를 함락시킨다. 피난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는 저항하다가 강화도 함락 소식을 듣고 항복하게 된다.
1637년 1월30일 추운 한겨울 현재 송파구 석촌 호수 자리인 삼전도(三田渡)의 수항단(受降壇)에서 열린 항복의식은 청나라의 일방적인 요구와 행패를 수용하게 되는데 1. 군사와 무기는 절대로 갖추지 말 것, 2. 하급관리가 입는 남색 옷을 입을 것. 3. 인조는 죄인의 몸이니 정문으로 나오지 말고 서문으로 나올 것을 다짐 받으면서 시작되었다.
왕은 왕자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127개의 돌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서 올라갔다. 그것도 한 계단마다 세 번 절을 하고 아홉 번 이마를 계단에 찧어서 이마가 터져 피가 흘러 가슴까지 흘러 내려야 했다(3배9고두, 삼전도비가 남아있음).
그 광경을 본 왕자들과 신하들의 느낌은 어떠했을까? 의식이 끝난 후에도 인조임금은 청태종 홍타시가 물러가라는 명이 있을 때까지 추운 겨울 밭 한가운데 앉아 있어야 했다. 의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그 주변에서는 청나라로 끌려가기 위해 줄 서있는 사람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임금이시여 진정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조선의 자존심을 뭉개질 대로 뭉개졌다. 청나라는 바로 그것을 노렸다. 같은 혈족이면서 오랑캐라 무시한 것에 대한 철저한 보복을 하여 다시는 만주족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도전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패배 후 피폐해진 생활로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다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으며 어린 처녀들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는데 열 두 세살 어린 여자아이들은 삼학사와 같이 끌려가 군사들의 성노리개로 늙어가다 마지막에는 활받이로 생을 마쳤다. 이때 끌려간 포로수가 17만 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는 포르투갈이나 아라비아, 유럽 등지로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다.
그 후 끌려간 백성들을 돌려받기 위한 교섭으로 10년 지난 후 5만 명이 돌아왔는데 양반들은 100냥, 선비 딸은 50냥, 일반백성은 5냥 하는 식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속환 해왔는데 조정에서는 속환사를 두어 속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도 이었으니 그 규모를 감히 짐작 할만하다. 돌아온 사람 중에는1년이 못되어 2만 명이 자살했는데 대부분 여자들이었다. 이들을 환향녀(還鄕女)라고 불렀는데 욕으로 변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만주족을 오랑캐라 업신여기고 중화사상에 빠져 제 민족정신을 잃고 정신을 차리지 못한 대가를 처절하게 받은 것이다.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신 충렬공 오달제의 얼을 이어가자.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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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성 2013-09-27 19:23:32
환향녀...으음...
지금은 정신을 차려야 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