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4)
진주성-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09.28 16:5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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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신간회 창립 95주년 기념(4)

청년동맹 집행위원과 신간회 간사로 활동한 정창세(鄭昌世)는 중안보통학교를 졸업했고 기근구제를 위한 조선기근구제회 대표자 겸 준비위원이 되어 김기태, 하진, 민치종 등과 함께 활동했다는 내용이 동아일보 1929년 5월 7일자에 보도되었다. 강두석에 의하면 정창세는 활달하고 투쟁력이 강한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1927년 10월 창립당시 간사로 선출되고 1929년 12월 감사위원으로 선출된 김사영(金思永)은 평안동 575-1번지에서 사법대서소를 경영했다. 김사영도 봉래동 진주교회 교인으로 봉사정신이 투철했다. 진주여고 설립당시 허만정, 양지환 등과 함께 설립인가를 위한 모임에 주도적으로 참석했다(1923년 1월). 동아일보 1926년 7월 25일자에 의하면 정규용(鄭圭鎔)과 함께 진주여고 학급증설을 위한 탄원서를 경남도 학무과에 제출해 성사시켰다.

강두형(1903~1969)은 동봉동(현 계동)에서 삼성(三省)상회를 경영했고, 제판소 앞 평안동에서 잡화상인 이신상회를 경영하기도 했다. 1927년 10월 신간회 진주지회 간사로 선출되었고 1928년 3월 조직선전부 간사를 겸하게 된다. 1923년 4월 형평운동 당시에는 발기인 중 한명이었다. 아들 강선규는 봉래초등학교 제2회 졸업생이다.

박진환(1886~1940)은 평안동 432번지 출신으로 1919년 3월 진주 3・1운동을 총지휘하다 일경에 끌려가 3년 징역형을 언도받아 고생했다. 출옥 후 1921년 4월부터 진주청년회 서무 겸 사교부장으로 활동했다. 1923년 3월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간사, 형평운동 발기인(1923.4), 진주기근구제회 집행위원(1924.10), 진주유치원 학무위원(1924.10) 등으로 활동했다.

미풍양속의 문란을 걱정해 1934년 9월 수정동에 경로당을 신축할 때 강상호, 정창조, 정종근 등과 진주기생들의 찬조금을 받아 완공한 일도 있다.

아우 박영환은 진주공립보통학교 5회 졸업생이며 1919년 4월 항일전단 수천장을 배포하다 일경에 체포되기도 했다. 동아일보 진주지국 직원과 기자(1925년)로 활동한 일도 있다. 또 진주청년회 주최 대강연회가 실시될 때 한규상과 함께 계몽강연으로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보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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