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설화산책(說話散策)
진주성-설화산책(說話散策)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2.12.01 17:23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설화산책(說話散策)

최영 장군이 잠시 낮잠을 자다가 집 뒤뜰 배나무로 용이 올라가는 꿈을 꾸고 황급히 일어나 나가보니 왠 꼬마가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 최영장군이 그 꼬마를 부르자 그는 도망가지 않고 정중히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그를 유심히 살펴본 장군은 그 꼬마를 손녀의 배필로 삼았다. 맹씨 행단에서 전해지는 설화의 일부인데 배를 따던 꼬마가 바로 고불(古佛) 맹사성(1360~1438)대감이다. 최영 장군이 낮잠을 자던 집은 오늘날 맹씨 행단으로 불리고 있다.

옛날 맹사성이 올랐던 배나무는 사라지고 없지만, 맹씨 행단은 맹사성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와 함께 싱싱함을 더하고 있다. 나지막한 야산의 입구에 자리한 맹씨 행단. 원래 이 집은 고려의 운명을 짊어졌던 최영 장군의 사가다. 최영 장군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자 빈집이 된 이 집에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인 고불 맹사성이 살게 된 것이다.

고불의 할아버지는 맹유로 불사이군을 주장하며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두문동 명현이었고 아버지 맹희도 역시 두문동 72현의 한사람으로 부자 모두 두문동 72현에 이름을 올렸다. 신창 맹씨의 시조는 중국의 사상가 맹자(孟子)이며, 고불은 신창 맹씨의 중시조인 맹의(孟儀)의 4세손이다.

맹사성은 고려 우왕 12년(1386년) 문과에 급제해 예문춘추관 검열, 우헌납 등을 지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 수원판관, 예조정랑, 등을 지내고 1406년 이조참의, 예문관제학을 거쳐 진전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한성부윤이 됐다. 뒤에 호조 공조 이조판서를 지내고 예문관 대제학을 겸했다.

1425년 명나라를 다녀와서 문신으로는 최초로 삼군도진무가 되고 1427년 우의정이 되었고 1430년 태종실록을 감수하고 1431년 좌의정으로 춘추관영사를 겸임해 팔도지리지를 찬진하고 1435년 사임한 뒤 1438년 졸했다.

맹사성은 세종의 문화시대를 황희와 함께 이끈 쌍두마차였으며 정승으로서 서민적인 모습으로 이름나 있다. 또 목민관으로서 안동에 재임 중 고을에 젊은 과부가 많은 것을 알고, 원인을 파악해 낙동강변에 나무를 심고 물길을 돌려 젊은 남자들이 일찍 죽는 것을 막았다고 한다.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백리(淸白吏)로 오늘날까지 공직자의 청렴성의 표상이 되는 인물이다. 그의 호 꼬부리(古佛, 허리가 휜)가 나타내듯 권위적이지 않고 각계각층과 소통에 나섰으며, 세종이 실록을 보고자 했으나 거절한 사건 등은 대쪽 같은 선비 상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곧은 성품으로 오늘날에도 공직자의 귀감으로 시사하는 바 크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