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38선의 진실(2)‘내가 듣기로는 번즈 국무장관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한 멀리 한반도의 북쪽에서 일본군이 항복을 받도록 선을 그으라고 국방부 작전국 정책과에서 건의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육군은 한반도로부터 먼 거리와 병력 부족이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애물에 직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먼저 한반도에 진입하는 쪽에서 일본군 항복을 받아야 한다. 소련이 이의를 제기해 실제로 병력을 제때에 보낼 수 있는 거리에다 선을 그어야 했다면, 그 선은 38선보다 훨씬 남쪽에 그어졌을 것이다. 북위 38도선을 따라 군부가 선을 그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울에서 일본의 항복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소련군은 곧 38선을 봉쇄하고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독일이 연합군에 1945년 5월 7일 항복한 뒤, 소련은 전쟁 중 점령한 동부독일을 비롯해 체고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라, 루마니아 등 동유럽 나라 전부를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미국이 1945년 한반도에 38선을 그은 것은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군이 점령한 서부독일과 일본은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채택해 오늘날 경제 대국이 되었고, 역시 미군이 점령했던 남한은 오늘날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이 되었다. 그 기초는 박정희 대통령이 기초를 다져놓았기에 가능했다고 역사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군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했다가 1989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당시 고르바초프 공산당 서기장에 의해) 간신히 자유를 되찾았고, 역시 소련군이 점령했던 북한은 아직도 공산독재에 집착하는 김일성 3대 세습 정권에 의해 지구상 가장 가난하고 자유가 없는 거지 나라가 되었음이 증명되고 있지 않은가?
첫 번째는 1945년 일본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우리민족을 일제(日帝)의 36년 압제(壓制)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두 번째는 38선을 그어 남쪽에서나마 시장경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해 주었다. 세 번째는 김일성이 시작한 6·25동란 때 즉각 군대를 보내 김일성 적화야욕을 분쇄했다.
6·25동란의 참화를 3년간(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3일·1127일간)이나 겪으면서 국토는 잿더미가 되었던 승자도 패자도 없는 아픈 역사를 겪었던 때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몇 년 전 실시한 조사에서 육사생도 34%가 미국을 주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고 필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야말로 6.25동란은 한국 현대사 최악의 비극이자,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고통과 모순을 배태시킨 가장 결정적인 역사적 사건이었다. 필자는 6.25동란 때 겨울 눈이 마당 가득히 쌓였는데 한밤중에 인민군이 집에 들이 닥쳐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젊은 남자들을 모두 잡아가는 아픈 상처가 있다. 그리고 한 때는 인민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기도 했다.
또 연합군이 우리 동네에 들어와 총싸움이 밤새도록 벌어지고 난 다음날 아침에 집 앞 들판에 나가 보았더니 시체들이 즐비하게 깔려 있는 광경도 목격하기도 했다. 6.25에 대해 그 개념을 정리해 보기로 한다. 나라 간에 선전포고를 하고 치르는 전쟁은 ‘전쟁’이라 하지만 선전포고 없이 불법으로 침범을 감행하면 이는 ‘동란’이라고 해야 한다고 1992년 4월 20일 역사편찬회에서 발간한 『6.25 동란사』에서 정의하고 있다. 6·25는 전쟁이 아니고 동란이다. 묘청의 란(1135), 정중부의 란(1170),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이괄의 란(1624), 병자호란(1636)의 아픈 상처를 상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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