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지난 2022년 우리 곁을 떠난 기억에 남는 몇몇 사람들을 회고해 보니 해외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내각 총리대신(7월 8일·68세), “한국의 유엔기념공원에 전우들과 함께 묻히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긴 6·25동란 때 참전한 한국을 사랑한 영국 용사 제임스 그룬디(8월 10일·91세), 개혁 개방 정책으로 냉전체제에 마침표를 찍은 소비에트 연방 마지막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8월 30일), 장쩌민 중국인민공화국 전 주석(11월 30일·96세), ‘상대보다 0.5초 빨라야 한다’는 명언을 남긴 축구 황제 펠레(12월 29일·82세), 국내에는 ‘창의적 르네상스 맨’이라고 하던 이어령(2월 26일·88세) 초대문화부 장관, 세계 최고령 TV 음악 경연 프로그램 진행자로(Oldest TV music talent show host)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재된 송해(6월 8일·95세), ‘이게 뭡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긴 자유인 김동길(10월 4일·94세) 교수, ‘청탁 피하려 6년간 홀로 식사한’ 윤관(11월 14일·87세) 전 대법원장이었다. 먼저 떠난 이들의 극락왕생을 빌면서 이에 우리에게 교훈이 되는 유언이나 묘비명 들을 연속으로 몇 회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유언이란 자기의 사망으로 인하여 효력을 발생시킬 것으로 하여 일정한 방식에 따라서 행하는 단독의 의사표시이며, 망자(亡者)의 일생 사적을 적은 글을 흔히 묘도문자(墓道文字)라고 한다. 묘도문자는 땅 위에 세우는 신도비(神道碑)·묘표(墓標·墓表)·묘갈(墓碣) 등 묘비에 새기는 것과 땅속에 묻는 묘지(墓誌)·광지(壙誌) 등 묘지에 새기는 것이 있다. 따라서 묘비와 묘지는 구별되지만 관습적으로 묘비라고 아울러 부르는 경향이 있다. 한 개인이 죽음을 의식하여 작성하는 자찬(自撰)의 묘도문자도 자찬묘비와 자찬묘지를 구별하고 자찬비지(自撰碑誌)라고 통칭해야 하겠지만, 두 가지를 아울러 자찬묘비라고 부를 수도 있다.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런 일은 자만시(自輓詩)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이라고도 한다. 자만시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애도하는 시(詩)요, 만가시(輓歌詩)란 상여를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로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노래이다.
고려 태조의 신하인 평장사(平章事) 조맹(趙孟)의 30세손(世孫)으로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한 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떨어진 옷과 짚신을 신고서 부역하는 사람들과 함께 노동했으며, 바깥을 드나들 때 소를 타고 다녔다고 하는 조운흘(趙云仡:1332~1404·72세)이 미리 써 둔 묘비명은 ‘공자는 행단위에 계셨고 석가는 쌍수 아래 계셨네. 고금의 성인과 현인 가운데 그 어찌 독존한 분 있었나. 쯧쯧 내 인생 끝이로구나.’ 본관 풍양, 호는 석간서하옹(石磵棲霞翁)이다. 서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그는 아미타불을 외웠다. 친구가 수령으로 있었는데, 조운흘의 창밖에 와서“조운흘! 조운흘!”하고 불렀다. “어째서 내 이름을 부르느냐?” 하자, 그 수령은 “공은 부처가 되려고 염불을 하니, 내가 공을 부르는 것은 공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오.” 했다. 둘은 크게 웃었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자신의 덕을 숨기려 했던 것이다. 묘지명의 끝에 자신을 공자나 석가의 경우에 견주어 보았다. 공자는 행단 위에서 제자들에게 강론했다고 전한다. 행단은 현재 산둥성에 있는 공자의 사당 앞에 있는 단이다. 한편 석가는 쌍수 아래에서 제자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열반(涅槃)에 들었다고 한다. 쌍수는 인도의 발제하(跋提河) 가에 있던 두 그루의 사라 나무이다. 부처가 입적할 때 하나의 뿌리에서 두 줄기가 나와 한 쌍을 이루었다고 한다. 두 분은 유아독존(唯我獨尊)과 특립독행(特立獨行:홀로 서서 우뚝하게 나아감)을 했지만, 별도로 제자들을 두어 법과 도를 전했다. 조운흘은 제자들을 둘 수조차 없는 고독한 처지임을 서글퍼했다. 남은 것은 죽음이다. 관직 생활에 대해서는 “비록 큰 치적은 없었으나 시속의 비루함도 없었다.”라고 자평했다. 72세 때 병 때문에 광주의 고원성(古垣城)에서 삶을 마쳤다.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가 없다. 해와 달을 옥구슬로 삼고 청풍명월을 술잔으로 삼아 양주고을의 아차산(峨嵯山) 남쪽 마하야(摩訶耶)에 장사 지냈다. 조선왕조는 ‘고려사’에 조운흘의 자찬묘지명을 실어 두고, ‘태종실록’의 졸기(卒記)에도 그 자찬묘지명을 실어 두어, 그의 개결(介潔)한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남긴 저서로 ‘석간집(石磵集)’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바위틈을 놀이터 삼아 살아가는 늙은이’라는 호가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진정한 풍류객(風流客)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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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가톨릭을 잘 모르니까, 세계사 정도로만 이해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