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1.16 15:1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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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

▶프랑스의 작가·의사·인문주의 학자였던 프랑수아 라블레(1483~1553·70세)의 묘비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다. ‘가장 비꼰 놈들을 비꼰, 그 해박한 코 큰 라블레 얇은 이 판자 아래 잠들어 죽음을 겁내는 놈들을 비웃으며 저승으로 떠났네!’ 그가 쓴 풍자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이야기’는 프랑스 르네상스의 최대 걸작으로 꼽힌다. 몽테뉴와 함께 16세기 프랑스 르네상스 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영국의 셰익스피어, 스페인의 세르반테스에 비견된다. 그의 죽음 자체가 속인(俗人)에 대한 조소(嘲笑)였다. 그는 파리의 성 바오로 대성당 묘지에 묻혔다.

▶6·25동란 때 참전한 영국 용사 제임스 그룬디(1931.6.22.~2022.8.10.91세)는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한국의 유엔기념공원에 전우들과 함께 묻히길 바란다.’ 용사는 영국의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20세 되던 해인 1951년 2월부터 1953년 6월까지 2년 4개월간 영국군 27연대 소속으로 6·25동란에 참전했다. ‘시신 수습 팀’소속이었던 그는 전국 격전지를 돌며 전우의 주검을 찾아 수습하고 부산의 묘역에 안장했다. 그렇게 그가 최전선에서 부산으로 옮겨 묻어준 주검만 90여 구(軀)였다. 그는 시신을 묻을 때마다 “나는 당신을 잊지 않겠다. 내가 꼭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복무를 마치고 귀국했던 그는 1988년 보훈처 초청으로 방한(訪韓)한 이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30여 년간 매년 자비를 들여 유엔기념공원을 찾았다.

그는 ‘한국을 사랑한 참전용사’로 불렸고, 2019년 유엔기념공원이 있는 부산 남구로부터 명예구민 패를 받았다. 2020년과 2021년 2년간 코로나로 방한하지 못했던 그는 암 투병으로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2022년 5월 힘겹게 부산을 다녀갔다. 2022년 10월 5일 부산 시민의 날에 초청돼 명예 시민증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두 달 전 영국에서 세상을 떠났다. 고인은 2010년 4월 7일 자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에서 ‘전쟁 당시 하루도 끔찍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온전한 시신이 드물었다. 굶어 죽은 사람이나 어린아이들 시신에는 가슴이 미어졌다. 지금도 악몽을 꾼다. 아내는 2008년 세상을 떠났다. 일곱 형제자매도 모두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가족이라곤 손녀 둘이 전부다. 그래도 부산에 수 백 명의 전우 가족이 있어 마냥 외로운 건 아니다. 난 영웅이 아니다. 내가 묻은 전우들이 영웅이다.’라고 했다.

한국의 수양 손녀인 A씨가 사비를 들여 유해를 국내로 모셔 와 자택에 보관하고 있었다. 보훈처는 영국 대사관과 협의 절차를 거쳐 6·25참전 용사를 기리기 위해 부산 유엔기념공원을 향해 1분간 묵념을 하는 국제추모 행사인 ‘턴 투·워드 부산(Turn To·ward Busan)’기념일(11월 11일)에 맞춰 대전현충원에 모셔 최고의 예우를 해 드렸다. 훌륭하도다. 하늘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

▶‘창의적 르네상스 맨’이라고 자처했던 이어령(李御寧(1934~2022.2.26.·88세) 초대문화부 장관은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 충남 아산 출신. 서울대 국문학과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뒤 인문학 전반을 아우르는 예봉을 휘두르며 100여 권의 저서를 냈다. 생전 언론 인터뷰에서 “짧게 말하겠다”면서도 홀로 서너 시간은 족히 쏟아내는 달변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던 이야기꾼이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을 총괄 기획하며 개회식에서 정적 속에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을 내세워 한국적인 여백의 미학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민주화에 성공한 나라의 자부심을 세계에 각인시켰다. 1990년 문화부 초대 장관에 취임한 뒤‘국립 국어원’을 세워 언어 순화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는 ‘장관으로서 가장 잘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라고 자평했다. 또‘한국예술종합학교’를 설립하며 문화인재양성의 초석을 놓았다. 교수·문예지 발행인·신문사 논설위원 등 10여 개가 넘는 직함을 거칠 정도로 다재다능했다. 2000년대 정보화 사회에 ‘digilog’란 개념을 주창하며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공존을 모색했다. 서재에는 7대의 컴퓨터와 2대의 스캐너 등 디지털 장비가 즐비했다. 아내 강인숙 건국대 명예교수는 “집에 오면 늘 컴퓨터에 파묻혀 글을 썼고, 몸이 성치 않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려서라도 원고를 써냈다.”고 회상했다. 2021년 금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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