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충렬공 하위지를 추모한다
진주성-충렬공 하위지를 추모한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2.01 15:1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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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충렬공 하위지를 추모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원문상으로 394회 기재된 분으로 본관은 진주, 출생지는 경북 구미(선산)이고 사육신의 한 분으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충신이다. 자는 천장(天章) 중장(仲章)이고 호는 단계(丹溪) 연풍(延風)이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435년 생원시를 거쳐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 급제한 천재였다. 1444년 오례의주(五禮儀註) 상정에 참여했다.

1451년 수양대군을 보좌해 진설(陳設)의 교정과 역대병요(歷代兵要) 편찬에 참여하였다. 부제학과 시강원에 복무했고 편수관을 겸하면서 역사서를 편찬하였고 세종대왕 31년 고려사 개찬에 참여하였다. 고려사 열전을 집필할 때 고려 인물 408명 중 추영수(장원 급제) 추적(민부판서) 2명을 포함시킨 공적이 있다. 침착하고 과묵한 청백리로 알려진 분이고 세조 즉위 후 받은 녹봉을 손대지 않고 별실에 저장해 두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1466년 단종 복위 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동료들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에 처해졌다. 그의 부인과 딸 2명은 권 씨 댁 노비가 되었고 15세 이하는 처벌되지 않았다. 뛰어난 문장가였지만 조선의 큰 별이 희생된 셈이다. 선조들은 신념을 위해 불사이군 충성심으로 목숨을 바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하위지의 막내 동생 하소지는 15세 이하이기 때문에 살아남았고 그의 아들 하원(河源)(1451~1518)은 대를 이어 무관 전력부위가 되고 국명에 따라 중부인 하위지의 후사를 이어가도록 했다.

영조대왕 34년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열공 시호를 내렸다. 1758년 하구용을 봉사손으로 정하고 대대로 이어지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순종 때 지방관을 보내 치제토록 하였다. 과천에 민절서원, 충주에 노은서원, 연산에 충곡서원, 영월 장릉 충신단 등이 있고 구미시의 월암서원은 1630년에 설립되었고 숙종대왕 때 사액되었다.

1988년에 경북 구미에 유허비가 세워져 지방 문화재가 되었고 ‘청구영언’ ‘화원악보’에 시조 24수가 전해 온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은 김천택이 노랫말을 모았고 2022년 4월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충열공의 작품과 함께 전국 도서관에 영인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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