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보훈 이야기-2·8 독립선언의 의미
든든한 보훈 이야기-2·8 독립선언의 의미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2.06 15:0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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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숙/경남서부보훈지청 보상과장
김주숙/경남서부보훈지청 보상과장-2·8 독립선언의 의미

입춘이 엊그제 지나고 보니 바깥 기온은 아직 차지만 마음으로는 봄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봄은 3월과 함께 시작되는 것 같다. 입학식도 3월에 있고 새 학기도 3월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 3월의 첫날은 3․1절이다.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3․1절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3․1 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2․8 독립선언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2․8 독립선언은 3․1 운동 보다 한 달여 앞서 도쿄 유학생 600여 명이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전 세계에 천명하기 위해 독립을 선언한 사건으로 이후 3․1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2․8 독립선언의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제창하자 재미 교포들이 독립운동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국 정부에 제출하였고 파리 강화 회의 및 국제 연맹에서 한국을 비롯한 약소 민족 대표들의 발언권을 인정해야 된다는 보도도 전해졌다. 이런 소식을 접한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반대하고 민족 자결을 요구하는 의사를 파리 강화 회의에 반영하기 위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켜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일본 유학생을 총괄하던 도쿄 조선 유학생 학우회는 1919년 1월 도쿄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고 결의하고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실행위원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결성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실행위원이던 송계백을 국내로 파견하여 유학생의 거사에 호응하여 국내에서도 궐기할 것을 요청하였다.

또한 2월 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 및 일본 정부, 일본 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유학생 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으나 경찰의 강제 해산으로 10명의 실행위원을 포함한 27명의 유학생이 검거되었다. 2․8 독립선언 후 지도부가 검거되자 새로운 지도부를 구성하여 일본국회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히비야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다시 발표하려고 했으나 해산되었고 조선청년독립단 민족대회촉진부 취지서를 인쇄하여 배포하고 시위 운동을 벌이려 했으나 도중에 발각되어 거사를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본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여 본국의 만세 시위 운동에 합류하기를 호소하였다. 일제 당국의 조사에 따르면 당시 3․1 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귀국한 한국인 총수는 491명. 그 중 유학생이 359명이었다고 하니 유학생들의 독립 의지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2․8 독립선언으로 1920년대 청년, 학생의 항일투쟁과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됐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계기가 마련되기도 했다. 올해는 2․8 독립선언이 있은 지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젊은 학생들이 국가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한 것처럼 2․8 독립선언의 정신을 잊지 않고 되새겨 우리 모두가 마주하고 있는 위기를 도전정신으로 극복하고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도록 노력한다면 나와 우리 모두가 더 행복하고 살기 좋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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