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봄비에 젖는 나목
진주성-봄비에 젖는 나목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2.21 16:01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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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봄비에 젖는 나목

봄비가 온다. 먼 산 희뿌연 비안개로 덧칠을 하고 바깥세상의 유리창을 소리 없이 적신다. 혹한에 지친 나목의 가지마다 서러움에 북받쳤던 눈물인 듯 방울방울 서럽다. 야위어 가늘어진 마디마디가 저리고 아리도록 시린 가슴을 서럽게 적신다. 무성하게 푸르렀던 이파리 하나도 영원한 내 것이 아니기에 남김없이 주려고 마지막 열정을 불태워 오색으로 물들였고, 훗날의 기억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록되도록 목말라했던 가랑잎 하나까지 아낌없이 주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훨훨 털어내고 홀가분해지고 나서야, 비로소 잃어버렸던 지난날을 기억해 낸 나목이 비를 맞고 섰다. 후회 없는 삶이었기에 회한의 눈물이 아니다. 폭풍우 앞에서 무릎 꿇지 않았고 절박한 목마름에도 비굴하지 않았기에 통한의 눈물도 아니다. 모질지 못해서 원한도 없는데 곡절 없이 울어야 하는 서러움의 눈물일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긴긴 겨울나기가 몸서리나서, 서러워서 섧게 우는 서러움의 눈물이다.

봄비가 내린다. 들녘에서 흙내음이 번져온다. 풋풋한 풋내음이 어우러져 야릇한 향기에 가슴이 뛴다. 이것이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임을 일깨워준다. 깊은 밤 부엉이 우는 소리를 베고 밤마다 새로운 내일을 위해 긴긴밤을 기도하며 지새웠고, 찬란한 아침을 위한 하얀 식탁보를 마련하느라고 여명을 걷고 아침 이슬에 옷깃을 무던히도 적셨다. 바람 소리, 물소리도 귀 기울이며, 산새 소리도 외면하지 않았다. 뙤약볕에는 그늘막으로, 폭풍우에는 바람막이로 전신을 내놓았다. 그래도 돌아보면 아찔한 벼랑길. 어째서일까, 삭풍으로 몰아치는 분풀이일까. 원한에 불타는 한풀이일까. 시린 발끝이 남긴 발자국마다, 무서리 내리고 된서리 내리던 날, 오상고절의 국화마저 고개를 숙이던 기억을 잊지 못한다.

삼라만상이 일그러지고 돌장승마저 휘청거렸다. 애타게 목말라하며 기다렸던 봄비가 온다. 동토에서 숨을 죽였던 만물의 깊은 잠을 깨우려고 봄비가 온다. 살아남아야 버팀목이 된다는 나목의 끈질김이 그래도 안쓰럽다. 혹한의 눈보라를 맞을 때가 더 짙푸른 송죽의 기품을 숭배하며 나목은 밤새껏 오지랖을 적신다. 칼바람이 불어도 버텨야 하고 폭설이 쏟아져도 견뎌야만 봄볕이 따사로운 내일이 온다는 애끓는 호소의 눈물일까. 새로운 봄을 기다리던 나목은 창밖에 초연히 서서 봄비에 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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