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의리 없는 사람들
진주성-의리 없는 사람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3.02 15:13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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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
심동섭/진주노인대학장-의리 없는 사람들

각종 선거 때가 되면 간(肝)이라도 빼어줄 듯 굽신거리던 인사가, 당선만 되고 나면 태도가 급변하고 어깨와 목에 힘이 생기는 모습을 가끔 본다. 지인이 보내온 글이 아마도 많이 본 듯한 글이지만 세상사가 다 그러하니 경계했으면 해서 옮겨본다.

정 진사는 한평생 살아오며 남의 가슴에 못 한 번 박은 적이 없고 적선 쌓은 것을 펼쳐 놓으면 아마도 만경창파 같은 들판을 덮고도 남을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그 많던 재산을 야금야금 팔아치워 겨우 제 식구들 굶기지 않을 정도의 중농 집안이 되었다. 정 진사네 사랑방엔 선비와 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부인과 혼기 찬 딸 둘은 허구한 날 밥상, 술상을 차려 사랑방에 들락날락하는 것이 일과였다.

어느 날 오랜만에 허법스님이 찾아왔다. 잊을 만하면 정 진사를 찾아와 고담준론(高談峻論)을 나누고 바람처럼 사라지는 허법스님을 정진사는 스승처럼 대했다. 스님은 정 진사에게 친구가 몇이냐고 물으니 약 70명은 넘을 것이라 대답했다.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친구란 하나 아니면 둘, 많아야 세 사람 이상이면 친구가 아닐세.” 두 사람은 밤새도록 곡차를 마시다가 삼경이 지나 잠에 떨어졌다. 정 진사가 눈을 떴을 때 스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스님이 다녀간 후 얼마 뒤 정 진사는 갑작스레 독감으로 돌아갔다.

부인과 딸 둘이 상복을 입고 머리를 떨어뜨린 채 침통하게 빈소를 지켰다. 진사 생전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던 글 친구들은 낯짝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친구가 문상을 와서 품속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어 미망인에게 건넸다. 봉투를 열어보니 차용증이었다. 정 진사가 돈 백 냥을 빌리고 입동 전에 갚겠다는 내용으로 진사의 낙관까지 찍혀 있었다. 또 한 사람의 문상객은 왕희지 족자 값 삼백 냥을 못 받았다며 지불각서를 내밀었다. 구일장을 치르는데 여드레째가 되니 이런저런 채권자들이 빈소를 가득 채웠다.

그때 허법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빈소에 들어섰다. 미망인이 한 뭉치 쥐고 있는 빚 문서를 낚아챈 스님은 병풍을 향해 고함쳤다. “정 진사! 일어나서 당신 글 친구들에게 빚이나 갚으시오.” 그 순간 병풍 뒤에서 삐거덕 관 뚜껑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정 진사가 걸어 나왔다. 빚쟁이 친구들은 혼비백산해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도망쳤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의리 없는 친구들이 가끔 있으니 가려서 경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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