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정태석(鄭泰奭) 진사의 공적
진주성-정태석(鄭泰奭) 진사의 공적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3.21 10:48
  • 14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정태석(鄭泰奭) 진사의 공적


조선 500년 마지막 진사시에 입격한 정태석(1870~1938) 선생은 1907년 봄에 전국적으로 전개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여 20원 의연금을 내고 친·인척들도 동참케 하여 30원~10원씩 내도록 지도했다. 1910년 봄 보릿고개로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의연금 10원을 내어 구제했다(지방신문 보도). 이웃 사랑, 민족 사랑을 실천하신 분이다.

1920년 진주여고, 진주고 설립할 때 발기인이 되었고 고액 6,500원(약 6억)을 기부하고 토지도 기부했다(1923년 동아일보). 1925년 11월 5일 보천교도 5명이 찾아와 임시정부 군자금을 요구하자 현금 100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전국적인 항일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서울에서 창립하자 진주 출신 하재화 선생과 함께 발기인 겸 중앙위원이 되었다. 신간회 사천지회, 진주지회 설립할 때 자문과 지도 역할을 하고 지회 설립을 도왔다(조선일보). 1934년 8월 사천 곤명수리조합 덕천강 호안 공사비를 기부했다. 1936년 진주에서 발간된 ‘영남춘추’ 잡지사의 고문이 되었다.

1934년 남해군 노량리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열사가 퇴락해도 일제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때 황의호를 통해 2억원을 기부해 중건케 했다. 당시 중건된 그대로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음을 본다. 진주성 창렬사는 임진왜란 때 순국하신 장군들을 모시고 있는데 퇴락해 형편없었는데 일제 눈치를 보며 서로 미루고 있을 때 정태석 선생이 중건회장에 추대되었고 고액을 기부해 중건하니 오늘까지 창열사가 유지될 수 있었으니 큰 공적이다.

1936년 진주 평거보통학교 발전기금을 내고 학부형회 고문으로 봉사했다. 일부 기록에 1938년 정태석 선생이 1만원을 지불했다고 하지만 1939년 봄에 70세 고령으로 재산 관리는 3명 아들이 맡았고 일제가 타인들의 기부를 독려하고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고액을 기부한 것으로 거짓으로 꾸민 것이다.

정태석 선생의 일생을 살펴볼 때 한시도 이웃, 민족, 지역을 위해 봉사 희생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30년간 애국, 애족, 애민을 실천하신 분이다. 진주성 비석군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산청, 하동, 사천 등지의 비석은 주민들이 건립해 현존하므로 그의 애국, 애민정신을 수범삼고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