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형평운동, 청년회관서 시작했다
기고-형평운동, 청년회관서 시작했다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02 14:44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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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형평운동, 청년회관서 시작했다

금년이 형평운동 100주년이다. 1894~1896년 갑오경장 때 신분제가 철폐되었으나 지방에는 신분에 대한 의식이 남아 있었고 새 호적에 백정들을 도한이라 기재해 자녀들이 학교 진학에 차별을 받게 되자 분개한 이들이 언론사 관계자 강상호, 신현수 등을 찾아가 호소함으로써 촉발된 사회운동이다.

1923년 4월 14일 70여 명의 지도자와 백정들이 진주시 계동 진주청년회관에 모여 형평사 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다음 날 청년회관 2층에서 80여 명이 모여 형평사 발기 총회를 개최하였다. 진주청년회관은 2층 목조건물인데 갤러리아 백화점 앞, 구 구세군 교회가 있었던 99번지 구 YMCA 앞에 있었고 축구, 정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 한쪽 북편에 세워져 있었는데 진주 부호이며 진주청년회장 박재표, 박재수(독립투사로 대통령 표창) 형제가 소유한 전답을 운동장으로 개조해 청년회관도 함께 있었고 건립된 지 1년 정도 된 새 건물이었다.

형평운동 첫 번째 모임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이들과 지식층이 대거 동참하게 되는데 강상호, 신현수, 정성호, 조우제, 김재홍, 천석구, 강대창, 강달영, 한영준, 박진환, 김찬성, 박태홍, 김의진, 장두관, 정용석, 강두형, 장지필, 이학찬, 이성순, 하석금, 유소만 등이다. 강상호 선생은 임시의장을 맡아 단체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임원 선출을 실시했다.

형평사 축하식이 있었다는 장소는 대안동 진주좌(명성약국 옆)이지만 발기인 모임 장소인 계동과 서로 다른데 처음 시작한 발기인 모임 장소가 가장 중요하고 회관 1층에는 경남 최초 유치원이 있었고 청년회, 노동운동, 강연회 장소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며 농민운동, 소년회 모임이 개최된 장소로 건물 밖으로 나오면 바로 축구, 정구를 할 수 있는 대형 운동장이 있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청년회관에서 600m 이내에 3.1운동 지도자들이 거주했고 청년회관 바로 뒤에는 기생조합이 있었고 국채보상운동 경남회가 있었고 국채보상운동 모금 장소가 인접한 곳이기도 했다.

형평운동가 강상호(1887~1957)선생은 초명 강경호(姜璟鎬)이고 진주시내 호적은 1945~1950년 사이 혼란기에 소실되었지만 본적지가 정촌면 가좌리 449번지이었기 때문에 소실되지 않고 보존된 것을 정촌면사무소에서 필자가 처음으로 발굴해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전시했었다. 직계 후손은 진주 시내 호적과 함께 소실되었다고 생각하고 반성면에 거주할 때 무적자로 새 호적을 만들었기 때문에 정촌면 호적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고 필자가 처음으로 옛 호적을 찾아 낸 것이다.

백촌 강상호 선생은 진농 1회 졸업생이고 약관 20세 때 1907년 3월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하고 또 3.1운동을 지도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고 1919년 11월 5일 가출옥했다. 출옥하자 청년운동을 시작하고 동아일보 주주 겸 진주지국 초대 지국장이었고 노동운동을 시작하였고 부친과 함께 봉양학교(봉래초등학교) 설립 공로자이며 진주노동공제회 집행위원, 경남도청 이전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정촌면민들이 납부할 호세를 9년간 대납한 선행자이며 9년 째에는 200원(약 9백만원)을 기부하신 분이다.

한겨레신문사에서 한국 현대사 인물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고 경상대학교 국어교육과 조규태 교수가 쓴 ‘백촌 강상호’ 책이 2020년 5월에 발간되었는데 펼쳐보니 180면에 필자가 지은 강상호 추모시가 등재되었다. 필자가 온갖 정성을 다해 자료 수집, 정리한 원고 950장을 압축해 필자의 역작 ‘진주항일운동사’ 98면~120면에 등재하였다.

3.1운동으로 옥고 치른 재판기록을 찾아 두 차례 포상신청서와 공적서, 이력서 등을 제출했지만 옥고 1년 이상이라는 포상 기준에 걸려 포상이 성사되지 않았다가 그 뒤에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는데 형평운동은 항일 독립운동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국채보상운동과 기타 짧은 옥고 등이 공적에 포함되지 못해 가장 낮은 포상이 되고 말았다. 형평운동기념탑은 96년에 진주성 입구에 건립되었고 칠암동 예술회관 앞 강변으로 옮겼는데 곧 제자리로 옮겨질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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