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실익 시대의 소고
진주성-실익 시대의 소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11 15:52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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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실익 시대의 소고

봄이면 여기저기서 문학지들이 창간된다. 신인 응모작의 심사를 봐 달라는 메일을 받거나 심사평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밤이 짧아진다. “불 끄고 주무세요” 아침 밥상머리에서 안사람의 말이 생각나서 “소득 없는 일에 전기만 태우나?” 하고 겸연쩍어했더니 “이제야 돈 벌 거요? 몸 상할까 걱정이지, 도울 건 도와줘요”라는 말에 한참 생각했다. 소득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은 돈 받으려고 하는 일이 아니면서 마음에 없는 소리를 했다 싶어 쑥스러웠다. 소득 없는 일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는 세상이라서 입에 익어 불쑥 나왔다.

약삭빠른 현실과 헐벗은 인정은 언제부턴가 앙숙이 되었다. 밥때 되어 방물장사 오면 숟가락 잡혀주고 날 저물어 길손이 들면 아랫목 내어주던 때는 현실이야 어떻든 인정 많은 인심이 앞섰다. 전설같이 들려도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대문물의 급물살을 타고부터 물질이 문화를 잠식하고 문명이 문화를 속박하며 현실이 인심을 외면했다. 인정이 실리 앞에 기를 못 펴고 밀려났다. 그도 그럴 것이 실익이 없으면 그 어디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뭐든, 없이는 아예 살 수가 없고 덜 가져도 힘들어져서, 갖는다는 것이 어찌 보면 삶의 목표인 것처럼 추구의 절대적 대상이자 가치의 정점이 되었다. 오로지 돈이고 재물이다. 고관대작들이 쇠고랑을 차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갖출 것 다 갖추고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왜 저럴까 하지만, 물욕의 끝은 절제가 아니면 그 끝이 없다. 절제는 오로지 의가 아니면 실행할 수 없고 물욕과 인정은 언제나 역주행이지 동행하지 못한다.

세 분 선현을 그립게 한다. ‘이름을 팔아 임금님의 벼슬을 도둑질하여 그 녹만 먹고, 할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신은 원치 않습니다’하고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않고 처사이기를 자처하셨던 남명선생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국난 앞에 선비의 도리를 다하기가 어렵구나’하시며 자결하신 매천 선생과 공짜로 주는 그 많은 은사금도 어찌하면 받지 않을까 하고 고심 끝에 자결하신 서비 선생을 기억해볼 때이다. 고성 학동의 서비정과 화엄사 들머리의 매천사나 덕산의 산천재가 진주에서 불과 한 시간 안팎의 거리에 있다. 딴에는 내로라하는 이들이야 뜻에도 없겠지만, 귀하고 귀해져서 보물보다 더 귀한 자녀들 데리고 나서면 하루해면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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