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3)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4.24 15:38
  • 15면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3)

▶고구려 제4대 민중왕(閔中王:?~AD48·재위:44~48·4년):이름은 해색주(解色朱). 제3대 대무신왕(大武神王)의 아우로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모본왕(慕本王)이 어려서 정사(政事)를 맡아 볼 수 없으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즉위 4년 차 되던 해 7월에 민중원(民中原)에 전렵(田獵:사냥)하다가 한 석굴(石窟)이 있음을 보고 좌우 신하에게 “내가 죽거든 반드시 여기다 화장해 주고 달리 능묘(陵墓)는 만들지 말라.”고 유언한 후 이듬해 돌아가니 군신들이 유명(遺命)을 어기기 어려워 석굴에 장사하고 묘호(廟號)를 민중왕(閔中王)이라 하였다. 죽을 때 나이는 얼마였는지 모르지만 돌아갈 인연의 안락처를 찾았던 모양이다.

▶로마제국의 여섯 번째 황제 세르비우스 셀피시우스 갈바(BC5~AD69·64세):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23세의 나이로 법무관에 임명된 후 집정관·라인강 방위군 지휘관·북아프리카 총독·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의 총독까지 올랐다. 네로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빈덱스에 의해 반란의 주모자로 추대되었다. 빈덱스는 군대에 의해 진압당했지만 원로원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가 국정에 관하여 내린 조치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중 하나가 네로의 선물을 몰수한 것으로 이 조치는 재정을 다시 확보하려고 그런 것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비판을 받았다. 거기다 수하들까지 탐욕적으로 재물을 긁어모아 사람들의 신임은 더욱 실추되기 시작했으며, 라인강 방위군이 갈바가 황제가 된 데에 불만을 품고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여 쿠데타군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죽을 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로마에 유리한 것이라면 뚫고 나가라(Strike if it be for the good of Rome).” 애국자였을까?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이탈리아 로마에 있는 살육의 투기장(鬪技場) 콜로세움 건설을 추진하다가 죽은 황제 베스파시아누스(AD9.11.17.~AD79.6.23.·70세, 재위:AD69~AD79·10년):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제국 시대에 만들어진 원형 경기장이다. 5만 명 이상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현재는 로마를 대표하는 유명한 관광지로 탈바꿈하였다. AD70년에 착공하여 AD80년에 완공되었다. 콜로세움 건설을 처음 추진한 사람은 네로 황제였다. 광기에 사로잡힌 그는 자신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거대한 건물을 로마 중심부에 짓기로 한다. 그러나 그가 군사 반란에 쫓겨 자살하는 바람에 건립 계획은 도중에 중단된다. 네로가 죽은 이후 내전을 거쳐 로마제국의 아홉 번째 황제가 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다시 공사를 진행하다가 3층까지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한 예술가가 죽는구나! 예술과 음악의 얼마나 큰 손실인가? 여보게, 나는 지금 신이 되어 가고 있다.”그는 죽은 후에 신이 되어 고국에 이바지하고 있다.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 모아 국익에 이바지하고 있으니 말이다.

공사를 완성한 사람은 아들인 티투스 황제였다. 티투스는 등극하기 전에 예루살렘과의 유대 독립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10만 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한다. 그리고 그중에서 4만 명의 포로를 동원하여, 드디어 콜로세움을 그의 아버지가 숨진 이듬해에 완공한다. 티투스 황제는 콜로세움의 완성을 기념해 100일 동안 축제를 벌였다. 이 기념행사 때 희생된 동물만 무려 9천 마리가 넘었다고 한다. 콜로세움에서 열린 축제 때 죽은 사람과 동물의 숫자를 적은 역사 기록에 따르면 검투사 2천 명·사자 70마리·야생말 40마리·코끼리 30마리·표범 30마리·기린 19마리·하이에나 10마리·호랑이 10마리·물소와 코뿔소 각 1마리 등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로마 정치가들에게 있어서 콜로세움은 검투사들끼리의 싸움이나 맹수들과의 싸움을 시민들에게 구경시킴으로써, 한편으로는 로마에 대한 일체감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심어주기 위한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또한, 이를 통해 로마나 귀족의 권위에 불복하는 세력들에게는 그 보복을 암시하는 공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건물의 설계자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티투스 황제는 상당히 서민적인 풍모의 황제로, 원로원과의 관계도 원만했으며 반대파들을 억누르기보단 설득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그는 “나는 개가 짖는다고 해서 개를 죽이진 않소.”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후세의 역사가들은 ‘네로 사후의 혼란을 잠재우고 번영기의 초석을 놓은 명군’으로 평가하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