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8)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8)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6.12 16:41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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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18)

▶고대 프랑크 왕국의 왕 카롤루스 대제(740~814·74세·재위:768~814·46년):벨기에 리에주 인근 프랑크왕국 왈롱나 주 에르스탈에서 출생. 11세 때인 751년 부친 피핀3세는 자카리아의 승인으로 메로빙거왕조 군주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프랑크회의에 의해 왕이 되었으며 이 과정을 유년기에 목격하면서 성장하다가 28세 되던 768년 9월 24일 왕위를 계승했다. 아우스트라시아와 북부지역을 승계하고 프랑크왕국의 왕에 취임. 자신은 고기를 구워 먹고 싶은데 의사들은 옥체를 생각하시어 삶아 잡수시라는 조언을 싫어했다. 늑막염에 걸려 마지막을 앞에 두었을 때 의사들 앞에서 “나를 그냥 내버려 두게! 당신들의 치료약 없이 죽는 것이 낫겠어!”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음을 슬기롭게 맞이했던 것 같다.

▶신라 42대 흥덕왕(777~836·59세·재위:826~836·10년):성은 김(金)이고, 초명은 수종(秀宗), 수승(秀升)이며, 즉위 후에 경휘(景徽)로 개명하였다. 아버지는 원성왕의 장남인 혜충태자(惠忠太子)이며, 어머니는 성목태후 김씨(聖穆太后 金氏)이다. 소성왕과 헌덕왕의 친동생이다. 왕비는 소성왕의 딸 장화부인(章和夫人:정목왕후로 추존)이다. 헌덕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청해진(淸海鎭)과 당성진(唐城鎭)을 설치하여 해적의 침탈을 막고 안으로는 백성들의 사치를 법으로 규제하였다. 827년 봄 정월,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를 지냈다. 당나라 문종(文宗)이 헌덕왕의 붕어(崩御) 소식을 듣고, 조회를 폐지하고 지절사(持節使)로 조문하도록 하였다.

828년 4월 장보고(張保皐)를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로 삼았다. 장보고는 당나라 서주(徐州)에 들어가 군중소장(軍中小將)이 되었다. 후에 귀국하여 흥덕왕을 알현하고, 군사 1만 명으로 청해진(淸海鎭)을 지키게 되었다. 겨울 12월,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대렴(大廉)이 차나무 종자를 가지고 왔기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선덕여왕(善德女王) 때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와서 크게 유행하였다.

830년 여름 4월,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 기도를 드리고, 이어 승려 15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831년 2월, 왕자 김능유(金能儒)와 승려 아홉 명을 당나라에 보냈으나 7월 귀국 길에 바다에 빠져 죽었다. 832년 봄과 여름에 가물어 땅이 붉게 탔다. 왕은 정전에 나가지 않고 음식을 줄였으며, 중앙과 지방의 죄수들을 사면하였다. 7월에야 비가 내렸다. 8월, 흉년이 들어 도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0월, 임금이 사람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833년 봄, 나라 안에 큰 기근이 들었다. 4월, 시조 묘에 참배하였다. 이 해에 전염병으로 죽은 백성이 많았다. 834년 9월, 왕이 서형산(西兄山) 아래에 행차하여 크게 군대를 사열하고, 무평문(武平門)에서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0월, 남쪽 지방의 주와 군을 두루 돌아보았다. 노인과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노인들을 찾아 위문하고, 곡식과 베를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김유신(金庾信)을 추봉(追封)하여 흥무왕(興武王)이라 하였다. 836년 12월, 왕이 붕어(崩御)하자 시호를 흥덕(興德)이라 하였다.

다음은 흥덕왕과 앵무새 일화이다. 흥덕왕이 즉위하고 두 달이 지난 826년 12월, 왕비인 장화부인(章和夫人)이 죽자 왕이 몹시 슬퍼하였다. 군신들이 새로운 왕비를 책봉할 것을 진언하였지만 왕은 "쌍쌍인 새도 자기의 짝을 잃으면 슬퍼하는데, 하물며 좋은 배필을 잃고 나서 어찌하여 무정하게도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하며 후비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한 시녀들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왕의 좌우에 내시 두 사람만을 심부름꾼으로 머물게 하였다. 장화부인을 정목왕후(定穆王后)로 추존하였다.

‘삼국유사’에도 흥덕왕이 왕비를 잃은 슬픔을 한 쌍의 새에 비유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흥덕왕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나라에 사신 갔던 사람이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암놈이 죽었고, 홀로 된 숫놈은 슬프게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시켜 앵무새 앞에 거울을 걸어놓게 하였다. 그러자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상이 자기 짝인 줄로만 알고 그 거울을 쪼아대었다. 그러다 곧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노래를 지었다고 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내가 죽거들랑 아내(章和王妃)와 합장하라”라고 유언을 했는데 유언대로 합장했다.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산 42번지에 위치한 신라 42대 국왕 흥덕왕 김경휘와 장화부인의 합장릉이 이곳에 있다. 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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