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장맛비 오는 날
진주성-장맛비 오는 날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6.27 16:06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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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
윤위식/수필가·한국문인협회 수필분과 회원-장맛비 오는 날

하늘이 희뿌옇게 낮아져 산과 들이 며칠째 장맛비에 젖는다.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에 자동차 바퀴에서 물이 튀는 소리까지 섞여 쉴새 없이 시끄럽다. 그런데 시끄러워서 못 살겠다가 아니고 가만히 듣고 있으면 별별 생각들을 나게 하여 들을 만도 하다.

장마가 시작된다는 일기예보를 듣고 아파트 베란다 바닥에 대자리를 깔고 일찌감치 자리 잡기를 잘했다. 작은 소반을 꺼내와서 노트북을 올려놓으니 내 살림살이는 다 차려진 셈이다. 여름철에는 비 오는 날이 아니면 온종일 햇볕이 차지하고 범접도 못 하게 접근금지구역이었던 베란다를, 장마 덕분에 꿰차고 앉았으니 복 만난 것 같다. 산도 보이고 들도 보이고 차도 보이고 오가는 사람들도 한눈에 다 내려다보여서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아서 속이 시원하다. 희뿌연 비안개만 걷혀주면 빗줄기의 멋이 한층 더할 건데, 때를 기다릴 참이다.

엊그제만 해도 봄풀만 무성하게 자라서 파랗던 들녘이 온통 흙탕물이었다. 무논 갈이 하는 트랙터가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꾸물대더니 드넓은 들판이 황갈색으로 변했다. 모심는 이양기 소리는 들리지도 않더니만 어느새 푸른 잎이 쫑긋쫑긋 옛 기억을 불러온다. 흰옷 입은 남정네들이 누렁이 소를 몰며 쟁기질하던 옛 살던 고향 풍경이 빗속에 펼쳐진다.

가난을 갈아엎는 쟁기를 따라 송아지도 즐거워서 까불거린다. 함지박을 줄줄이 머리에 이고, 미끌미끌한 논두렁을 타고 위태위태한 걸음걸이도 그저 신바람이 났다. 누군가는 둠벙에서 물을 길어오고 또 누군가는 언덕배기 비탈밭에서 들배추 뽑아오면, 또 한 사람은 양은 대야에 박 바가지 엎어놓고 들배추 숭덩숭덩 썰어 소금 슬쩍 뿌려 젓국 장 찔끔 붓고, 고춧가루 철철 뿌려서 버무린 들배추 생 조리. 하라고도 말라고도 말 한마디 없어도 어찌도 그렇게 손발이 척척 맞았을까.

보릿짚 불 냄새 나게 구워온 갈치 한 토막을, 미리 따온 감나무 이파리에 얹어주면 손바닥에 받아들고, 쌀과 보리 반반 섞인 김 오르는 밥을 박 바가지에 비비면, 질금질금 내리는 장맛비가 국물을 보태어 삶의 진국이 행복으로 질펀하게 버무려졌다. 모내기꾼들의 질박한 웃음소리에, 가을 풍년의 햅쌀밥 냄새가 먼저 알고 무논에서 달려온다.

아침저녁으로 엘리베이터에 빼곡하게 함께 탄 아래 위층 사람들의 화장품 냄새보다 그들의 땀 냄새가 더 그리워지는 까닭은 어째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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