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상원 음력 2월 1일 중화절
정월 대보름 상원 음력 2월 1일 중화절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13.03.26 19: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민수/문화재칼럼리스트

1415년 1월 18일 태종이 정월 대보름인 상원일의 등불을 켜고 복을 비는 연등을 혁파하였다. 1416년 1월 15일 상원의 등에 불을 켜서 여기저기 사방에 벌여 달아 놓는 장등을 없앴다. 태종이 “상원일의 장등은 고제와 중국 조정의 법에 의하여 하고자 하나 조선국에서는 이 제도를 좇지 아니한 지 오래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상원의 장등을 없애고, 이미 준비한 등은 4월 초8일에 쓰게 하라” 말하였다.

1770년 1월 14일 영조가 상원일에 민간의 광통교를 중심으로 하여, 열 두 다리를 밟으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한다 하여 달 아래에서 즐거이 놀던 답교하기 위해 의금부에 명하여 밤에 통행 금지를 해제하게 하였으니, 백성들과 나라가 안정되어 아무 걱정 없고 평안한 태평을 같이 즐기는 뜻을 보인 것이다.

1771년 1월 15일 영절에 성문을 열어 야간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는 방야하도록 명하였는데 정월 대보름날 밤에 답교하는 놀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화절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농사철의 시작을 기념하던 절일로 음력 2월 1일을 일컫는다. 

중화절은 농사가 중요한 생업이었던 만큼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기 위한 날이었다. 국왕이 백관들로 하여금 농서를 올리게 하고, 또 술과 음식을 베풀고 중화척을 나누어줌으로써 농업이 국가의 근본임을 나타내었다. 1796년(정조 20) 음력 2월 1일에 처음으로 정조 임금이 공경과 근신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중화척을 나누어줌으로써 중화절이 비롯되었다. 중화척은 반죽이나 적목(이깔나무)으로 만든 자인데, 바느질자인 포백척 보다 조금 짧다.

정조는 이 중화척을 나누어주면서 “자를 중화절에 나누어주는 것은 신하들에 대한 국왕의 신임을 상징하는 것이니 신하들은 능력을 다하여 나를 잘 보좌해달라”는 내용의 시를 지었다. 동국세시기 2월조에 보면 “2월 초하루에 화간에서 벼이삭을 내려 송병을 만들어 종들에게 나이 수대로 먹인다. 그래서 속칭 이 날을 노비일이라고 한다.
2월이 되면 겨울철 시베리아 기단의 차가운 북서풍이 약해지고 양자강 기단의 남서풍이 불어오는 환절기로 이른바 꽃샘추위가 있고 기압골의 이동이 빈번해서 날씨의 변덕이 심한 때이다. 농한기가 계속되지만 땅이 해동하는 시기로 식물의 소생도 함께 이루어져 농사에 대한 준비가 활기를 띠는 시점이 된다.

음력 2월 초하룻날인 영등날에 하늘에서 내려와 집집마다 다니면서 실정을 조사하고 2월 스무날에 하늘로 올라가는데 바람을 다스리는 영등할머니를 잘 대접하여 농사의 풍년과 가정의 안녕을 기원했다. 영남ㆍ호남지방에는 풍년을 기원하여 여러 가지 곡식 이삭을 볏짚단에 싸서 세우는 장대 볏가릿대인 화간(禾竿) 풍속이 있다.

경기ㆍ충청지방에서는 송병을 나이떡이라 해서 나이만큼 먹는 곳이 있다. 함경도에서는 집 안팎을 대청소하며, 가축 우리도 깨끗하게 청소한다. 그리고 “향랑각씨속거천리지외”, “행진강남수천리” 같은 문구의 부적을 써서 집안에 붙이기도 했다. 이는 노래기로 대표되는 벌레들이 멀리 가라는 의미이다. 또 천장에는 ‘충’자를 써서 붙이고 방의 네 기둥에는 종이에 ‘조’자를 써서 붙이기도 했다.

이는 새가 벌레, 곧 노래기를 잡아먹으라는 뜻이다. 이 날 부녀자들은 마을에서 방이 큰 집에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고 북, 장구 또는 큰 대야에 물을 가득 붓고 쪽박을 물 위에 엎어놓고 숟가락으로 때리며 물장구를 치면서 춤도 추고 즐겁게 놀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