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3)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7.17 15:5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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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3)

▶몽골은 오늘날 크게 네 영역으로 조각나 있다. 첫째는 외몽골이다. 외몽골은 북몽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유엔에 가입되어 있는 몽골국이다. 둘째는 내몽골이다. 내몽골은 남몽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는 중국의 네이멍구 자치구이므로 중국령 몽골이라고 한다. 셋째는 부랴트몽골(Buryat-mongol)이다. 부랴트몽골은 동북몽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러시아 연방 내의 공화국으로 국방과 외교를 러시아 연방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정식국가가 아닌 러시아령 몽골이라고 한다. 넷째는 칼미크 몽골(Kalmıq-mongol)이다. 칼미크 몽골은 서몽골이라고도 하는데 현재 러시아 남부의 카스피해 인근에 거주하는 몽골계 민족이므로 러시아 연방 내의 일개 공화국으로 국방과 외교를 러시아 연방에서 담당하고 있다.

지금은 이렇게 조각 조각나 별 볼 일 없는 약소국이 되었지만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제국은 25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간 정복했던 땅보다 더 많은 땅을 정복했던 위대한 나라였다. 더욱 놀랄 일은 약 30개국에 걸쳐 수억 명의 인구를 정복했던 몽골 부족의 당시 인구는 100만에 불과했고 그중에서도 군인은 10만 명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칭기즈칸은 그렇게 작은 부족과 군대로 유라시아 대륙의 광대한 땅을 정복하기 위해 실크로드 주변에 고립되어 있었던 도시들을 점령한 다음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아 말들이 쉽게 달릴 수 있도록 했다. 그로 인해 당시 역참(驛站)제가 가장 발달했던 나라가 바로 몽골제국이었다. 그 덕분에 실크로드는 거대한 자유무역지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몽골제국은 칭기즈칸 사후에도 150년간이나 위세를 떨쳤고, 제국 붕괴 후에도 그의 후손들은 칸(Khan)·황제·술탄(Sultan)·왕·샤(Shah)·아미르(amīr)·달라이라마(Dalai-Lama) 등, 다양한 호칭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 칭기즈칸 후손 중의 가장 마지막 통치자는 1920년까지 자리를 지켰던 우즈베키스탄 부하라(Bukhara)의 알림 칸(Alim Khan)이었다.

위대한 정복자였던 칭기즈칸의 피라미드 같은 거대한 무덤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거대한 무덤이 있을 법한데 지금까지 어디에서도 칭기즈칸의 무덤은 물론이고 작은 기념비 하나 발견된 적이 없다. 구전(口傳)되어 내려온 이야기에 의하면 그가 숨진 후 장례를 맡았던 병사들은 비밀리에 칭기즈칸을 땅에 묻고 기병(騎兵) 800명을 동원하여 그 땅을 평지처럼 다져 무덤의 흔적을 지운 후 그 기병들은 다른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그 병사들은 또 다른 병사들에게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칭기즈칸은 800년 가까이 몽골의 광활한 대지 어디에선가 편히 잠자고 있다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왜 자기 무덤을 아무도 찾지 못하게 했을까? 혹시라도 너무 많은 정벌 전쟁을 통해 너무 많은 인명을 살상했기 때문에 사후에 무덤을 파헤치고 부관참시(剖棺斬屍)라도 당할 가능성을 염려해서는 아니었을까?

박정희 대통령은 개발독재라는 비판이 한참 들끓었을 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면서 자신의 공과(功過)는 역사의 평가에 맡기겠다고 일갈했다. 역사의 평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마다의 시대정신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하다. ‘역사는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 그런 역사를 어떻게 남기느냐는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남긴 행적에 달려있다. 그대는 가문과 민족의 후손을 위해 어떤 삶의 행적을 남기고 있는가? 그대가 남긴 대로 후손들은 선대의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대의 행적을 평하게 될 것이다. 오욕(汚辱)의 행적을 남길 것인지, 영광의 행적을 남길 것인지는 그대 하기 나름이다. 오늘날 우리 정치권에 과연 그런 역사의 평가를 두려워하는 참된 정치인이 몇 명이나 될까?

▶영국 관습법의 아버지 헨리 2세(재위:1154~1189·35년):자신의 사후에 영토를 분할하여 아들들에게 넘겨줄 계획을 했으나 이것이 오히려 부모 자식들 사이, 형제들 사이에 분란을 가져왔다. 아들 중 리처드 편을 드는 왕비 알리에노르는 전 남편인 프랑스 국왕을 끌어들여 남편과 전투를 벌였다. 중병에 걸려 시농 성(城)에 누워 있을 때 신하가 반역자 명단을 가지고 왔다. 제일 위에는 그토록 사랑하던 막내아들 존의 이름이 있었다. 막내아들도 아버지의 힘이 약해지자 반역에 나선 것이었다. 반역자의 명단 중에 아들의 이름을 보자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나는 이 세상일을 생각할 기력도 없노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얼마나 무상한가! 세상의 권력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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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여진 2023-07-21 23:39:43
몽골 하면 칸, 게르, 시력 좋은 사람들 정도로만 떠올렸지 오늘날 크게 네 개로 나뉘었다는 건 몰랐네요. 제가 예전에 본 바로는 교수님이 칼럼에서 말씀하신대로 병사들을 죽여 무덤 위치를 숨겼다는 설과 강물을 아예 파헤쳐 물길을 바꾼 뒤 묻고 다시 강을 원상복구시켜버려 도굴꾼들이 얼씬도 못하게 했다는 설 두 개를 들어봤던 것 같은데 흥미롭네요. 그나저나 자기 하나 죽은 걸 가지고 참 수많은 목숨을 도굴 막겠다고 죽였겠군요. 제가 그 시대에 살았으면 진즉에 죽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ㅎㅎ그리고 마지막에 추가로 이야기해주신 영국 관습법의 아버지 헨리 2세의 이야기도 정말 흥미롭네요. 반역자 명단에 아들이 있고 그 충격으로 몸져 눕다니 자식이 없는 전 가늠할 수도 없는 슬픔이겠어요. 유익하고 재밌는 칼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