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8)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8)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04 14:38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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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28)

조선을 창업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1335~1408·73세.재위:1392~1398·6년)가 왕위에 등극하게 된 사연과 마지막 남긴 유언을 소개하고자 한다. 고려 우왕(禑王) 10년(1384년)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1만 집의 닭이 ‘꼬끼요’하며 일시에 울고 1천 집에서 일제히 두들겨대는 다듬이 소리가 났다. 허름한 집에 들어가 서까래 세 개를 지고 나왔으며 꽃이 떨어지고 거울이 땅에 떨어져 깨졌다. 꿈이 하도 신기하여 이웃에 사는 노파를 찾아가 해몽(解夢)을 부탁했더니 그 노파는 정중히 사양하며 다른 곳을 소개해 주었다.

“여기서 40리(里) 가량 떨어진 설봉산(雪峯山) 토굴(土窟)에 이상한 스님이 한 분 계십니다. 솔잎을 먹으며 칡베 옷을 입고 사는 그를, 얼굴이 검다 하여 세상 사람들은 ‘흑두타(黑頭陀)’라 부르지요. 그곳에서 그는 9년 넘도록 꼼짝 않고 수행하고 있으니 거기 가서 물으시면 좋은 해몽을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성계는 토굴을 찾아가 예(禮)를 올리고 찾아온 뜻을 말한다. “모두 앞으로 임금이 될 것을 예고하는 꿈입니다. 1만 집의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高貴位:꼬끼요의 音譯)를 경하(慶賀)하는 것이고 1천 집의 다듬이 소리는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御近當)을 알리는 겁니다. 꽃이 떨어지면 열매를 맺게 되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입니다. 또 서까래 셋을 지면(負) 임금 ‘왕(王)’자(字)가 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이성계에게 당부했다. “오늘 일을 절대 입 밖에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 큰일은 쉽게 이루어지는 게 아닌 만큼 이곳에 절 하나를 세우고 이름을 ‘왕 될 꿈을 해몽한 절’이라는 뜻으로 ‘석왕사(釋王寺)’라 했으면 좋겠습니다. 거듭 당부하거니와 십분 조심하십시오.” 이성계는 자리를 물러나 예를 올리며 말한다. “삼가 가르침대로 따르겠습니다. 부디 큰 일이 원만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이성계는 1년 만에 절을 짓고 3년 동안 불공을 드렸는데 아무도 그가 그렇게 하는 까닭을 몰랐다.

고려 우왕(禑王) 14년(戊辰)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도통사(都統使)로 삼아 요동을 공략하게 했다. 위화도(威化島)에 이르러 대의(大義)를 밝혀 군대를 되돌렸다.

공양왕(恭讓王) 4년인 1392년 7월 16일 이성계는 임금 자리에 오른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곧 설봉사(雪峰寺) 토굴의 스님을 찾도록 하여 왕사(王師)로 봉(奉)하니 이 스님이 바로 무학(無學)이다. 무학은 토굴에서 나와 태조 이성계를 위해 그 조상들의 산소를 옮기고 나라의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도록 했다. 무학은 한양(漢陽)에 이르러 “인왕산(仁王山)으로 진산(鎭山)을 삼고 백악(白岳)과 남산(南山)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를 삼아 도읍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정도전(鄭道傳)이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자고로 임금은 모두 남향하여 나라를 다스려왔습니다. 동향하여 다스렸다는 예는 없습니다.” 무학은 아쉬움을 표하며 “내 말을 쫓지 않으면 200년 뒤 틀림없이 내 말을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위 이야기는 서산대사(西山大師)가 지은 ‘석왕사기(釋王寺記)’에 적혀있다. 또 신라 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지었다는 ‘산수기(山水記)’에도 한양 도읍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하려고 하는 이가 만약 스님의 말을 듣고 따르면 나라를 연존(延存)할 수 있다는 약간의 희망이 있다. 그러나 정(鄭)씨 성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시비하면 채 5대(代)도 지나지 않아 임금 자리를 뺏고 빼앗기는 재앙이 있으며 도읍한 지 200년 쯤 뒤 나라가 위태로운 국난(國難)을 당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님은 무학을 가리키고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은 정도전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고려가 아니라 고조선을 계승한 국가란 의미에서 ‘조선(朝鮮)’이라고 국호를 지었다. 또 자신이 멸망시킨 국가의 수도에 계속 있을 수 없었기에 개경에서 한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창덕궁에서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운명하기 전 “조상들이 계신 함흥에 묻어 달라”고 했으나 역대 임금이 제사를 지내러 함흥까지 가야 하니 곤란하다는 반응이 나오자 “그럼 함흥에서 가져온 억새로 내 봉분을 덮어 달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봉분이 잔디가 아닌 억새로 덮여 있다. 이 무덤(건원릉:경기도 구리시)은 2009년에 다른 조선 왕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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