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1)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1)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09.25 16:06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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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1)

▶중세 영국 요크 왕가 최후의 왕 리처드 3세(1452~1485·33세, 재위:1483~1485‧2년). 전쟁치고는 너무나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장미전쟁(1455~1485)’이란 왕위쟁탈전이 15세기 영국에서 발생한다. 야심만만한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중세 말기에 영국과 프랑스가 벌인 전쟁인 ‘백년전쟁(1337~1453·116년)’을 일으킨 주인공이다. 에드워드 3세의 후손들이 ‘랭카스터’가(家)와‘요크’가(家)로 나뉘어 피비린내 나는 왕위쟁탈전쟁을 치르게 되어 많은 귀족들이 죽어 나갔다. 그때 ‘랭카스터’가는 빨강 장미, ‘요크’가는 흰 장미가 가문의 문양이었기에 그 살벌한 전쟁이 ‘장미전쟁’이 되었다.

랭커스터가의 마지막 왕 헨리 6세를 물리치고 ‘요크’가의 시대를 연 에드워드 4세는 12살의 어린 에드워드 5세를 남기고 죽었다. 그때 에드워드 4세를 도와 많은 공을 세운 동생 글로스터백작은 조카 에드워드 5세와 그의 9살 된 동생을 런던탑에 가두고 리처드 3세란 이름의 왕이 되었다. 나중에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은 살해되는데 리처드 3세의 소행으로 보지만 아니란 설도 있다.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된 리처드 3세는 2년 남짓 왕위를 지켰을 뿐 헨리 7세에게 왕위쟁탈전 싸움에서 패해 왕위를 빼앗기고 죽으면서 “나는 영국의 왕으로서 죽을 것이다. 나는 한 발자국도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이 반역자.”라는 유언을 남기고 생을 마감했다.

튜더왕조 시대를 살았던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1564∼1616)는 그의 희곡 ‘리처드 3세’에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악당으로 리처드 3세를 묘사해 가여운 조카 에드워드 5세의 슬픔을 달래주고 있다. 그의 희곡은 아직까지 세계에서 절찬리 공연 중인데 그 속의 리처드 3세는 곱추에 절름발이인 천하의 흉물에 천하의 악당으로 묘사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도 춘원 이광수(1892∼1950)는 ‘단종애사(端宗哀史)’라는 작품으로 단종의 편에서 단종의 비극을 예리한 필치로 묘사했는데, 춘원을 싫어했던 김동인(1900∼1951)은 ‘대 수양’으로 수양의 입장을 피력하며 맞섰지만, 강자를 미워하는 국민 정서로 단종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은 사실이었다. 세조도 조카를 죽인 죄의식 속에서 평생 벗어나진 못했던 듯하며 아들인 의경세자의 요절과 예종과 며느리 장순왕후의 이른 죽음, 증손자 연산의 폭정과 폐위 등 편치 않은 가족사를 남기게 되었다.

이는 너무나 흡사한 동·서양의 무서운 삼촌의 이야기이다. 세조의 왕위 찬탈의 서막인 계유정난이 1453년에 발생했는데 1453년은 길고도 길었던 세상에서 가장 긴 전쟁인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종식된 해이기도 하며, 천년의 역사를 가진 비잔틴제국(동로마)이 오스만제국에 멸망한 해이기도 하다. 그가 어떤 인물인가에 관해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가와 문필가들은 그를 잔인무도한 악한으로 묘사한 반면 현대의 학자들은 그를 크나큰 잠재적 능력을 지닌 군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 역사학계의 놀라운 사건 중 하나는 그동안 잃어버렸던 리처드 3세의 유골이 2012년에 발견된 일이다. 역사학자·고고학자들은 런던 북쪽 160km 레스터시의 시내 주차장 바닥을 조사하여 유골을 찾아냈고, 방사선탄소 연대 측정과 DNA 테스트를 통해 이 유골이 리처드 3세의 것임을 확인했다. 그가 전사한 후 작은 교회에 묻혔다가 이 교회가 무너져 사라지는 바람에 왕의 유골도 땅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추정했다(영국 레스터대학 연구팀). 셰익스피어의 묘사가 사실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척추측만증으로 몸통이 크게 휘어 있었고, 해골을 스캐닝해서 만들어본 얼굴 모습은 런던 국립초상화미술관에 있는 사악한 모습과 꽤 닮았다는 평을 듣는다. 무엇보다 그의 두개골에 나 있는 11곳의 칼자국, 특히 후두부의 두개골 일부를 깨뜨릴 정도의 강력한 칼자국은 마지막에 그가 죽을 때 주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는 방증이라 할 수 있다. 어쨌거나 관도 없이 묻혔다가 유골마저 유실되었던 이 불행한 국왕은 527년이 지나서 다시 정중하게 재매장되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가 집전한 의식을 통해 레스터 대성당에 시신이 다시 묻힐 때 유명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가 영국 계관시인 캐럴 앤 더피의 시를 낭독했다. 영국 역사학자들은 시를 낭독한 컴버배치가 리처드 3세 국왕의 먼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조선 역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수양대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슬픈 죽음이 있었다면 그와 너무나 유사한 사건이 멀고도 먼 유럽 서쪽 끝의 나라 영국에서도 발생하였다. 시기도 유사한 15세기 중반 무렵이었다. 업보와 윤회의 교훈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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