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3)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3)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16 16:12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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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3)

▶다른 사육신은 아들·아버지·형제·조카들까지 처형하였으나 하위지에게만은 예외를 두어 그의 어린 조카들인 하포, 하원은 사형에 처하지 않고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하위지의 본뜻은 진실로 단종을 위하는 일에 있었기 때문에 세조의 녹(祿)을 먹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세조가 즉위한 해부터의 봉록은 따로 한 방에 쌓아 두고 먹지를 않았다.

또 한 사람 특히 박팽년의 재주를 사랑하여 “자신에게 귀부하여 모의 사실을 숨기기만 하면 살려줄 것”이라고 은밀히 유시하였다. 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지라 웃음만 지었을 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進賜)라 하고 상감(上監:왕을 높여 부르는 말)이라 부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그대가 나에게 이미 ‘신’이라고 칭하였는데도 지금 와서 비록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자, 그는 “나는 상왕(上王:단종)의 신하이지 나으리의 신하는 아니므로 충청감사로 있을 때에 한번도 ‘신’자를 쓴 일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박팽년이 보낸 장계와 상소를 모두 갖다 보니 신하 신(臣)이 아니고 클 거(巨)로 되어 있었다. 세조는 더욱 노기를 띠어 심한 고문을 가하면서 함께 모의한 자들을 대라고 하였다. 박팽년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서슴없이 성삼문·하위지·유성원·이개·김문기·성승·박정·권자신·송석동·윤영손·이휘와 자신의 아비 중림이라 대답하였다. 박팽년은 혹독한 형문을 당하면서도 세조에게 상감, 주상이라 하지 않고, 진사(進賜), 나으리(羅阿里)라고 불렀다. 그는 심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죽었으며, 다른 모의자들도 능지처사(凌遲處死) 당하였다. 그의 아버지도 능지처사되고, 동생 대년(大年)과 아들 헌(憲)·순(珣)·분(奮)이 모두 처형되어 삼대가 참화를 입었다.

세조 즉위 이후에 받은 월급은 받지 않고, 한 창고에 쌓아 두었다. 세조는 사육신과 관련자들을 비롯한 그 남성 일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 유배 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로 충군하였으며,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의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1457년 9월에,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이자 세조의 넷째 동생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금성대군과 관련자들을 모두 처형하였다. 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세조로 하여금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됐고, 조카인 단종을 죽이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 뒤 안평대군은 양가의 재산을 적몰하고, 가족과 측근들을 노비로 삼았고 그해 10월 19일 강화도 배소에서 사사했다.

야사에 의하면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피부에 고름이 생기는 병증이 심해져 갔는데 어의(御醫)들의 치료는 효과가 없었다. 치료를 위해 아산의 온양온천 등에 행궁하기도 했다. 한번은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51세 되던 해인 1468년 9월 7일(재위 13년) 신하들이 예종에게 양위하는 것을 반대하자 “운이 떠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인데, 너희들이 나의 뜻을 어기고자 하느냐? 이는 나의 죽음을 재촉하고자 하는 것이다.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石室)과 석곽(石槨)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屛風石)을 쓰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다음 날인 9월 8일 수강궁 정전에서 승하(昇遐)하였다.

조카 단종을 몰아내어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세조가 아니었다면 어린 단종을 둘러싼 구신(舊臣)들의 세력 다툼에 조선왕조가 위기를 맞았을 것이라는 역사학자들의 평가도 있다. “운이 떠난 영웅은 자유롭지 못한 것”이라는 세조의 유언은 권력의 유혹이나 재물의 집착에서 허우적대다가 떠날 때를 놓치고 추한 모습으로 인생의 말미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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