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성-진주교회 약사
진주성-진주교회 약사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18 16:05
  •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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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
추호석/진주 문화원 향토연구실장·향토사학자·시인-진주교회 약사

10월 20일은 경남 진주교회 창립기념일이다. 첫 예배는 1905년 10월 22일. 진주에 진주교회 간판을 단 곳이 10여 곳 있다. 그러나 실제로 진주교회로 인정할 수 있는 곳은 봉래동 37번지 진주교회와 평안동 149번지 진주교회 2곳이다. 2곳 교회 연혁사를 보면 최초 설립일이 1905년 10월인데 택시 타고 진주교회 가자고 말하면 봉래동 진주교회 입구에 세워 준다.

처음에 옥봉리 예배당이었던 진주교회는 호주 선교사들이 개신교 전도의 시작점으로 최초의 근대식 기독교라고 하고 진주 복음 전파의 산실이요 어머니 교회가 되었다. 1905년 9월 29일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장로교 소속 선교사인 거열:커렐(진주가 약 1360년전 거열주 이었음)의사가 조선인 박성애(남자) 가족과 함께 진주에 도착해 초가에서 예배를 보면서 시작되었다. 선교사가 보기에 진주는 우상 숭배와 탕자와 창녀들이 우글거리는 음란한 고린도성과 같은 곳이었다.

진주 북문 안에 있던 성내 4동에 8칸짜리 초가에 설립하고 함석 지붕으로 변경했고 비 오면 비가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선교사 딸들의 노란 색 머리와 파란 눈을 가진 인형 같은 아기 등을 보려고 구경꾼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1909년 일반인들이 백정들과 동석 예배를 반대한 일을 형평운동의 시작이라고 본다(현재 봉래동 비전관 입구에 기념 동판). 1913년 7월 초가를 남자의 광림학교로 사용했다. 여학생 시원여학교는 여자 선교사 이름으로 1939년 7월까지 존속했다(2013년 1월 수정동 북편에 기념비 동판). 1919년 3.1운동 동참 기념 동판이 입구에 부착되었고 3.1운동 기념 종과 종각은 예배당 입구에 성금을 모아 2012년 3월 복원했다.(종 원판은 단계교회 목사가 천안시 고신대학원 박물관으로 이관시킴)

박성애 목사가 조선인 최초 목사가 되었다. 이어 김이제 목사, 이약신 목사, 윤인구 목사. 김용규 목사, 김영환 목사, 심문태 목사, 황철도 목사, 김동권 목사(1975~2007년), 송영의 목사(2007~현재)가 목회하고 평안동 진주교회는 최임경 목사, 윤영국 목사, 김기덕(2013~현재) 목사가 목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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