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4)
칼럼-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4)
  • 경남도민신문
  • 승인 2023.10.23 15:47
  •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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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
전경익/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유언이나 묘비명이 남긴 교훈(34)

▶조선 제9대 임금 성종(成宗:1457~1494·37세, 재위:1469~1494·25년)은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아버지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권에서 제외되었으나, 숙부 예종이 재위 1년 만인 19세에 일찍 죽어 할머니인 정희왕후와 훈구파 대신들의 추대로 즉위했다. 즉위 후 태종과 세조에 의해 숙청된 사림파를 적극 등용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지키고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노력하였다.

한명회·신숙주 등 훈구 대신들의 세력을 견제하려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친정(親政) 이후에는 외척 세력의 영향력이 강하였다. 여색을 좋아하여 여러 후궁들 간의 갈등을 다스리지 못하고 흔들렸다. 재위 5년 때인 1474년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가 죽은 뒤 숙의(淑儀) 윤씨가 왕의 총애를 받아 계비(繼妃)로 들어온 뒤 원자 융(뒤의 연산군:燕山君)을 낳았다. 왕의 총애가 두터워짐에 따라 교만하고 방자함이 심하여 제빈(諸嬪)을 투기할 뿐만 아니라, 1477년에는 비상(砒霜:독약)을 사용해 왕과 후궁들을 독살하려는 등 갖가지 혐의가 드러나 왕과 인수대비(仁粹大妃)의 미움을 샀다.

급기야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불손한 일까지 있게 되었다. 이에 1479년 많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좌의정 윤필상 등의 의논에 따라 폐해 서인(庶人)으로 만들어 친정으로 쫓아 보냈다. 그 뒤 신하들이 원자의 어머니를 민간인으로 살게 해서는 안 된다며 조정에서 거처할 곳과 생활비 일체를 지급해줄 것을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왕의 노여움만 사게 되었다. 윤비는 폐출된 뒤로 밤낮으로 소리 내어 우니, 왕도 마음이 움직여 환관(宦官)으로 하여금 정상을 알아보게 하였다. “윤씨가 화장을 하고 있으며 뉘우침의 빛이 전혀 없더라”라고 거짓 보고하게 하여, 마침내 1482년(성종 13) 좌승지 이세좌를 보내어 사약으로 자진(自盡)하게 하였다.

윤씨는 죽음에 이르러 “원자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 옆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주시오”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피와 약으로 더럽혀진 수건과 비단 적삼을 남겼다. 원자 융은 당시 4세로서 이 사실을 모르고 자랐으나 왕위에 올랐다. 성종은 뒷일을 걱정하여 “폐비(廢妃) 윤씨 문제는 나의 사후 100년 뒤까지는 절대로 거론하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폐비 윤씨 사사(賜死)사건은 아들 연산군으로 하여금 대량 숙청을 불러오는 빌미를 제공한다.

1504년(연산군 10) 임사홍이 신수근과 손을 잡고 부중(府中)의 훈구 세력과 사림파의 잔존 세력을 제거할 계략으로 당시 후궁이었던 엄숙의와 정숙의가 성종대왕께 참소를 하여 어머니가 사약을 받고 죽게 되었다고 알려주었는데 연산군은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두 후궁을 궁궐 뒤뜰에서 매를 때려 죽게 하였다. 당시 병석에 있던 인수대비(연산군의 할머니)가 그 말을 듣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쫓아 나왔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에게 “선대왕이 사랑했던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죽일 수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연산군은 할머니를 머리로 받아 버렸다. 손자에게 얻어맞은 인수대비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며칠 뒤에 죽고 말았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서 정숙의가 낳은 이복동생 안양군과 봉안군에게 큰 칼을 씌워 옥에 가두었다가 곤장을 쳐서 죽였다. 그 후로 연산군은 춘추관에 명하여 생모 윤씨의 사거에 관련된 인물들을 철저하게 조사하여 바치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무려 7개월에 걸쳐서 그 명단에 포함된 사람들을 잔혹하게 죽였다. 윤씨의 폐위와 사사에 찬성한 살아 있던 대신들 10여 명은 참형을 하고 이미 죽은 한명회 등 12명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되었다. 이 밖에도 이에 관련된 8촌의 친척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 사건이 1504년(연산군 10) 3월에 시작된 ‘갑자사화’이다. 이 과정을 최초로 문학에 담은 것이 박종화씨의 ‘금삼의 피’이며 우리나라 역대 영화 흥행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던 ‘왕의 남자’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성종의 대표업적은 ‘경국대전’ 편찬이다. 무덤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가 묻혀있다. 선릉(宣陵)으로 사적 제199호이다.

가짜 뉴스가 판을 치는 요즘의 현실이 환관의 거짓 보고가 임금의 어머니를 억울한 죽음으로 불러오고 있는 것과 같아 이념 갈등의 골이 깊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위정자들이여, 언론인들이여 반대를 위한 반대에 빠진 정치나 언론 플레이 좀 하지 말고 국익우선(國益優先)의 애국을 우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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